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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What a small world!

“What a small world!”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서양인 아저씨가 타향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건네는 인사인 듯하였다. 지나며 들리는 남의 겉치레 인사에도 괜히 내가 울컥하는 경우가 있다. 부디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날 방콕에서 내가 그랬다. 나는 서글픈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 달렸다. 달리다 돌아와 확인한 그의 로커는 비어 있었다. 로커의 틈으로 이메일 주소라도 끼워넣어 후일을 도모할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래도 슬프진 않았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가 아니라, 언젠간 만나겠지, 생각한다.

우리는 초면이 아니었다. 방콕인지 푸껫인지 홍콩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스쳤다. 그가 나를 기억하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기억한다. 훌륭한 분이군, 하지만 인연은 아닌가보군, 대강의 기억은 그렇다. 그리고 잊었다. 또다시 설 연휴의 방콕이었다. 어딘가 가다가 발길을 멈춰서 쇼를 보고 있었다. 쇼를 보다가 옆에 서 있는 그를 보았고, 그를 기억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작업을 거는지 영어가 오가고 있었고, 눈길을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나의 동선에 또다시 들어왔지만 언감생심 무언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설렘은 다음날 시작됐다. 운동을 마치고 마사지 예약을 바꾸러 갔다. 마침 그가 친구들과 예약 데스크에 있었다. 뜻밖에 눈길이 마주쳤고, 설렘은 시작됐다. 그래도 우연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만나면, 가벼운 인사를, 허무한 다짐만 남았다. 다음날 밤 마을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리자 앞의 택시에서 내리는 일행이 보였다. 일행 사이에 그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호텔 로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설레는 만큼 어색했다. 그의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먼저 타고, 내가 오르자 “삐익!” 어쩌나 내리는 수밖에. 이어진 그들의 나지막한 합창 “쏘리”. 그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또 한번 눈길이 마주쳤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랑을 나눴지라고 박진영은 노래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허탈했다. 또다시 다음날,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그분이 등장한 것이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 하지만 한번 유예된 인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법. 그래도 안간힘을 짜내서 떨리는 “하이”, 다행히 그가 인사를 받았다. 자리가 모자란 식당에서 식사를 마쳤으므로 더이상 시간을 ‘죽일’ 명분이 없었다. 하필이면 일찍 일어난 자신을 원망했다. 방으로 돌아와,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또다시 아침의 식당에서 마주쳤다. 거의 동시에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접시에 담고서, 오믈렛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란히 서 있는 우리 사이에 (당연히) 침묵이 흘렀다. “하이.” 다음의 대사는 적당치 않았다. 접시를 들고서 어디서 왔냐고, 이름이 뭐냐고, 묻기엔 적당치 않았다. 오믈렛이 완성됐고, 그가 오믈렛을 받아갈 차례였다. 그가 가벼운 고갯짓으로 내게 오믈렛을 양보했다. 마주보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가끔은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오믈렛의 호의로도 충분하다고, 진심으로 그분에게 감사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돌아와 또다시 그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호젓한 공간에 우리만 있었다. 마침내 어디서 왔냐고,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그가 되물었다. “투나잇”이라고 대답했다. “투나잇?” 그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그리고 둘만의 10분이 흘렀다. 그는 애인과 함께 왔다고 했다. 내가 친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행 중에 애인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하늘이 허락한 행운은 여기까지, 날카로운 키스의 추억은 그렇게 내 곁을 스쳤다. 이제는 이러한 일들이 슬프기보다는 애절할 뿐이다. 자꾸만 부딪치는 인연을 수긍하고, 인연을 허락한 절대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직도 가끔은 걷다가 간절한 마음이 들지만, 온밤을 뒤척이지는 않는다.

‘보고 또 보고’의 우연은 적잖이 생긴다. 드넓은 동아시아를 주유하면서도 동선이 비슷한 사람들은 만나고 또 만난다. 인구의 수와 공간의 넓이를 생각하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과학이다. 어느 때에 어느 도시의 어느 곳에 가는 것이 정해진 이들에게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약속하지 않아도 만난다. 언젠가는 서울에서 만났던 대만 사람과 서울에서 만났던 타이 사람을 방콕에서 만났다. 그들은 클럽에서 춤추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애인이었고, 그들은 나에게 원나이트 스탠드 파트너였다. 이렇게 세상이 작다고 느끼게 만드는 경험이 있다. What a small world! What a wonderful world? 다음엔 홍콩을 거쳐서 방콕에 가겠지. 어쩌다 생각나 혹시나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겠지. 못다한 인사, “See you, 再見, 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