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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훌라걸스는 제2, 제3의 이상일이다

‘一山一家.’ ‘하나의 광산, 하나의 가족’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 광산촌 소녀들은 도쿄에서 온 선생님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를 만큼 단단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은 공동의 고립감. 그들을 오해하고 폄하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완성한다. 그런데 하나의 가족인 광산촌 사람들은 폐광으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훌라걸스>는 거기서 시작한다.

열심히 살아온 탄광촌 사람들은 억울하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시대가 그들을 ‘뒤처진 사람들’로 만들었다. 석탄의 시대가 거하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공동체는 흔들린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머무를 것이냐, 불확실한 변화에 미래를 걸어볼 것이냐, 공동체는 분열한다. 공동체는 하와이를 흉내낸 온천을 만들고 훌라춤을 추어서라도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미래파’와 광산촌의 역사와 전통을 사수해야 한다는 ‘역사파’가 충돌한다. 그곳에도 청춘들이 있다.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했던 광산촌 소녀들에게 광산의 위기는 뜻밖에 인생의 기회를 준다. 소녀들은 갑갑한 윤리를 벗어나 훌라춤을 추면서 행복을 맛본다. 그들은 갈등의 중심에 서지는 않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미래에 속한다. 그리하여 미래에 속하는 청춘은 어제에 머무른 부모와 갈등한다. 키미코와 어머니의 갈등은 세대간 갈등을 상징한다. <훌라걸스>에서 부모의 표정은 무뚝뚝하다. 특히 그들이 ‘익명의’ 부모일 때, 표정은 무섭게 변한다(키미코의 어머니가 야자수를 살리기 위해 난로를 모으러 다닐 때, 어머니를 가로막는 어른들의 표정을 떠올려보라). ‘고유명사’를 가진 키미코의 어머니처럼 어제에 속했다가 내일로 ‘전향하는’ 변화하는 부모 세대도 등장한다. <훌라걸스>는 물론 청춘의 편에 선다. 이상일의 영화는 <훌라걸스>뿐 아니라 <69 식스틴 나인>에서도 유희를 맛본 청춘들이, 즐거움으로 세상을 돌파하러 간다고 말하면서 끝난다.

어라,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다. <훌라걸스>가 중반쯤 지나자, 광산촌은 명백히 재일본 총련동포 사회로 보였다. 총련사회는 광산촌처럼 일본 주류한테 폄하와 왕따를 당해왔고, 구성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에서 뒤떨어진 공동체로 추락했다. 광부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석탄의 시대가 거하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듯이, 총련동포들이 아무리 양심에 따라서 체제를 선택했더라도 그들이 선택한 체제가 역사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수중을 떠난 역사다. 한때는 일왕이 방문할 정도로 중요했던 광산촌이 시간에 떠밀려 시대에 뒤떨어진 공동체가 됐듯이, 총련사회도 반세기 전에는 희망을 걸어볼 만한 공동체였지만 오늘날에는 일본이라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섬처럼 고립된 봉건적 공동체가 됐다. <훌라걸스>의 키미코처럼 재일동포 2세 이상일은 그렇게 저무는 공동체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유 정신을 지닌 예술가 지망생에게 총련사회의 봉건적 공기는 갑갑했을 것이다. 이상일과 같은 ‘출신성분’을 가진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에서도 미래인 청춘(세대)과 어제인 부모(세대)가 갈등한다(우연히도 이상일의 영화 <훌라걸스>와 가네시로의 소설 <고>에는 ‘하와이’가 나온다). 그들은 부모를 답답해하지만, 부모를 결코 잊지는 못한다. 역으로 지독한 강박증이다. 이런 그림자는 가네시로의 소설에서 <고>처럼 총련동포뿐 아니라 보편적인 청(소)년 부적응자를 그릴 때도 투영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모의 역사를 부정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모의 변화는 작품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키미코의 어머니처럼 결국은 자식을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는 부모들이 등장한다. 익명의 얼굴로서 부모 세대는 변화를 거부하는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구체적 얼굴로 부모는 결국엔 자식을 위해 웃음 짓는다. 집단적 부모 세대에 대한 거부감, 구체적 부모에 대한 연민은 재일동포 2~3세들이 앞세대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심정으로 읽힌다. 하지만 익명의 부모들도 부정만 당하진 않는다. 키미코가 광부였던 아버지와 광부인 오빠를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피땀으로 일구었던 역사는 오히려 긍정되고 세상의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들은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된다. ‘공화국’에 충성해온 총련 간부인 아버지를 찍은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에서도, 자유주의 예술가인 딸은 사회주의 활동가인 아버지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 아버지를 통해서 역사와 화해한다.

그들의 작품은 새로운 시작에서 끝난다.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았을 때가 위기”라는 그람시의 표현처럼, 그들은 여전히 위기다. 공동체의, 개인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됐으나 새로운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새로운 미래가 새로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훌라걸스>의 탄광촌이 관광지로 변신해도, 성공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설사 온천 사업이 성공해도, 주민에게 행복한 변화가 되기란 어렵다. 관광지의 돈바람은 탄광촌의 가치를 쓸어버리고, 사람들은 갈등할 것이다. 어쩌면 총련계 2~3세들에게 닥쳤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들이 갑갑하고 안온한 총련사회를 벗어나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정한 자본주의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돈바람이 몰아치는 자본주의에서, 그들은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출발점에 정지해 있다. 그래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 그들의 시선은 세상을 따뜻하게 비춘다. 남다른 갈등을 겪었던 그들도 특별한 매력을 지닌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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