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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하나로 대사, 음악, 효과음을 한꺼번에 녹음했어”
2001-10-24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한국영화 80% 녹음한 한양스튜디오 창립자인 초대 녹음기사 - 이경순(李敬淳 1921∼)

이경순에 대해서 “한 사람의 뛰어난 녹음기사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난 50년 동안 그는 영화녹음의 발전사 그 자체, 더 나아가서 한국영화사 발전에 하나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큰형이 운영하는 ‘춘일악기점’이라는 자전거포 겸 악기점에서 축음기와 유성기판, 라디오 보급과 수리 등의 일을 도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된 이경순은 1935년 서울의 빅터축음기주식회사 레코드부에서 각종 음향시설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해방 뒤 월남한 그는 1949년 주한미군 홍보대인 502부대에서 영화에 입문, 이후 협동제작소, 중앙청 공보처 영화과 녹음실,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녹음실을 거쳐 한양스튜디오를 설립하게 된다.

이경순 자신과 그의 감독하에 있는 한양스튜디오에서 완성한 녹음작품은 총 3500편 내외를 헤아린다. 이것은 1950년에서 1990년까지의 40년간, 해마다 제작된 한국영화의 70∼80%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영화를 감독이나 배우 같은 대중적 인기에 가까이 있는 예술가들의 공로로만 돌리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분야의 예술가, 기술자가 공평하게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영화에서 기술자 또한 탁월한 예술가라는 사실은 이경순의 작업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영화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경순을 “녹음감독”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경순이야말로 녹음감독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한국영화계 최초의 녹음기사다. 지난 50년간, 그가 개척한 한국의 영화녹음은 한양스튜디오와 영화진흥공사, 각 방송사와 그를 잇는 후배들의 작업실에서 다양한 진폭과 음색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이경순의 자서전 <소리의 창조-나의 영화녹음 50년>(한진출판사, 1996)에 이영일 선생이 쓴 서문을 요약·발췌한 것이다. 아래의 대담에는 이경순과 이영일 이외에도 촬영감독 유장산이 동석했다.- 필자)

미군부대 뉴스 찍고 남은 필름으로 영화 찍어

내가 삼팔선 넘어오던 그 이듬해(1947년)에, 이북에 넘어갔던 최칠복(녹음기사. 이경순과는 빅터축음기회사 실습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필자)이가 돌아와서는 날 찾아왔어요. 자기가 주한미군 502부대 녹음실에 있는데 날더러 같이 근무하자는 거지. 미군 502부대는 일제시대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조선총독부 산하단체인 어용 영화사. ‘조영’으로 약칭했다.- 필자)의 영화기재며 필름들을 인수해 관리를 하면서 홍보며 선전을 하던 부대였어요.

502에서 한국 사람들이 영화를 백이게 된 계기가 이래요. 해방돼서 일본애들이 다 들어가고 윤백남씨하고 여럿이서 ‘조선영화건설본부’를 만들었어요. ‘조영’ 자리에 들어갔죠. 좌익 애들은 ‘조선영화동맹’이라고 만들었죠. 위원장이 추민이었지? 최순영이가 촬영기사로 있었고. 근데 거기서 만든 건 다 걔들이 이북으로 가져갔어요. 그렇게 있다가 우익 영화인들이 극동영화사를 만들어가지고 502부대로 들어간 거예요. 502 들어가서 뉴스를 백이니까 필름을 천자를 줘요. 그거 백자 가지고 뉴스 찍고 나면 구백자를 그냥 우리를 줘요. 그래서 그거 가지고 ‘문화영화’(해방 직후 전쟁 전까지 붐을 이루던 기록영화들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 시사계몽, 북한에 대한 고발 등을 주제로 하였다.- 필자)를 찍었죠. 502부대에서 내가 이필우(촬영, 녹음, 현상, 연출 등 다방면의 선구자. 이 난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필자) 선생을 만났지요. 녹음기는 아루씨에(RCA- 필자)를 썼습니다. 그해 9월에 502부대가 USIS(미 공보원) 영화과로 개편되었습니다. 여기서 <전진대한보>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한달에 두번 나왔어요. 여기서부텀 동시녹음이 나왔지요.

6.25 때 진해에 내려가 <리버티튜스> 제작

USIS 있을 때 인제 이규환(영화감독. 이 난을 통해 소개되었다.- 필자)씨가 <돌아오는 어머니>를 찍었어요. 그거 우리가 녹음했죠. 스타디오(스튜디오- 필자)가 없다 녹음기계가 없다 해가지고 방송 끝난 다음에 그 방송 스튜디오에서 녹음들을 했어요. 그 다음에 <갈매기>(1947년- 필자)래는 거. 그것도 녹음기계가 없어가지고서 아예 녹음 기계를 만들었죠. 그걸 가지고 명동 ‘오오케 스타디오’에 가서 녹음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음악을 넣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이크 하나 매달아 놓고서는 뒤에서는 음악을 하고, 또 앞에서는 아후레코(후시녹음)를 하고, 그 옆에서는 또 효과를 하고 말이지. 효과판이 없어가지고 소리를 내려면 철판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6·25사변 나가지고서 부대 직원들이죠, 그 사람들 일행이 진해로 내려갔어요. 거기 가서 녹음실 만들고, 현상실 만들어가지고서 <리버티 뉴스>를 시작했죠. <리버티 뉴스>의 녹음, 현상, 카메라맨은 전부 한국 사람이죠. 그때 촬영이 임병호, 임진한, 배성학이. 그러고 김봉수, 김형근, 서은석, 이태환, 이태선, 현상실은 뭐 그런 정도고. 녹음에 최칠복씨, 나, 양후보. 편집에 김흥만, 김영희, 그 정돌 겁니다.

진해 있을 때, 미국에서 촬영기사하고 녹음기사가 한 사람씩 와서 협력을 했는데, 동시녹음을 했어요. 그 사람네들은 촬영을 하다가 에누지(NG- 필자)가 나도 참 태연해요. 미국인 장군한테 미안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끝나고 말이죠. 우리 같으면 좀 높은 사람들이 와서 찍는다 하게 되면 한번만 에누지가 나도 겁을 먹어 덜덜덜덜 떠는데, 이 사람네들은 자유롭게 영화 촬영허는구나, 느꼈지요. 그 녹음기사 이름이 코넨트였는데 우리가 자기보덤 녹음을 좀 잘해서 그러는지 뭣 땜에 그러는지 몰라도 좌우간 상당히 친절했어요. “우리 영화는 우리 손으로 녹음, 현상해야 한다!”

그러고서 거기에서 뉴스를 죽 하는데 국방부 정훈국(전쟁 당시 남한 영화인들은 미 공보원 USIS와 국방부 정훈국에 나누어 소속되어 있었다.- 필자)이 피난 내려왔습니다. 국방부는 녹음시설이 없었고 현상만 주로 했어요. 그때 촬영을 해서 기록으로 냄긴 것이 <정의의 진격>인데, 국방부에서 편집을 끝내 갖고 진해 USIS에 와가지고서 녹음을 넣어달라고 해요. 그래 우리 한국인들이 녹음을 해줄라고 했었는데, 미국인 책임자가 녹음을 해줄 수 없다, 이래 갖고 할 수가 없다 해가지고 일본까지 가서 녹음을 해가지고 왔습니다.(“이것을 본 나는 화가 치밀기도 하고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미국 사람이 너무나 도도해 보였지만 규칙을 내세워 거절하는 데야 별 도리 없었다. 불쌍하고 비참한 것은 결국 한국인이요, 한국 영화인이요, 우리 자신이 아닌가.”- 이경순 자서전 <소리의 창조> 중에서 인용.- 필자)

이걸 계기로 우리 미 공보원 영화인들이 회의를 했어요. 그때 김흥만(편집), 조백봉(음악), 김봉수, 김형근(현상), 정주용(축소), 나 여섯이서 의논했죠. “우리 영화인들이 우리 영화를 우리 손으로 녹음 현상 해야지 않겠느냐!” 그래가지고서는 여섯이 미 공보원을 빠져나와가지고서 해병 학교 교장 김대식 대령을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했더니 진해해병학교 목간통(목욕탕- 필자)을 주면서 거기다 해봐라. 거기다 편집, 현상, 녹음실을 차렸어요. ‘협동영화제작소’라고 턱 간판을 붙였죠. 그러나 녹음기가 없지요. 그래서 비행장에서 철판을 사다가, 또 래디오 가게에서 래디오를 한 서너개 얻어가지고 와서는 암푸(앰프- 필자) 만들고, 녹음기계 만들어 녹음을 시작한 거죠. 영사기계도 없어서 여기저기 군대 다니면서 빌려다가 논두랑으로 밀고 와가지고서는 끝나면 갖다 주고. 그래도 거기서 16mm나마 한국영화 현상 녹음을 시작헌 것이죠. 우리가 문을 여니까 공보처 <대한뉴우스>, 국방부 <국방뉴우스>가 다 몰려왔어요. 그리고 협동영화제작소에서 첫 작품으로 신상옥 데뷔작 <악야>(惡夜)(1952년작. “<악야>는 양공주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한국의 빈곤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현실 비판적 수작이다.”- 이영일 저, <한국영화전사>에서 인용)를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넘은 삼팔선>(감독 손우, 1951), <삼천만의 꽃다발>(감독 신경균, 1951)도 했지요. 진해 그 목간통이 방음이 잘 안 돼서 말야, 참 고생했습니다. 생활도 참 어려웠죠. 밀국수를 멸치국에 말아먹는 것만도 감지덕지였습니다. 담배도 군에서 나오는 거 한갑을 여럿이서 나눠 피웠죠. 뭐 상옥이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우리가 영화를 살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화를 했대는 거, 그건 참 우리가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53년에 전쟁이 끝나고. 서울 환도하는 길에 대구에 들렀습니다. 그때 대구 공군촬영대에서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3년. “<출격명령>은 해방 이후 본격적 전투 실사영화로 최초의 항공영화이다.”- 이영일, 앞의 책)을 찍고 있었습니다. 공군 정인엽(영화 촬영기사- 필자) 소령이 나더러 대구에서 녹음실을 하자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방직공장을 개조해 녹음실을 차리고 <출격명령> 녹음을 했습니다. 그 녹음을 하다가 중간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죠.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