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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밤과 낮>
강병진 2008-04-11

그녀는 <밤과 낮>을 보자고 했다. 아니, 도대체 왜? 나름 데이트라면 데이트인데, 홍상수의 영화가 웬말인가. 영화를 보는 동안 그녀는 영화 속의 남자에 빗대어 옆자리에 앉은 나를 간볼 게 분명했다. 너도 똑같잖아. 너가 아무리 입에 침바른 소리를 해봤자 저 남자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냐?(알면서 왜 그러시는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에 빗대어 ‘자기는 뭐 다른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은 더이상 연애에 기대를 걸지 않는 나이가 돼버린 남녀의 냉소 가득한 데이트처럼 보였다. 더이상 순진한 척을 할 수 없는, 했다간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한 데이트. 아마 <밤과 낮>을 미리 봤다면 내 스스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 조심해.”

그래놓고선 정작 <밤과 낮>을 볼 때는 내내 키득거렸다. 그녀는 그만 좀 웃으라며 내 팔을 찔렀지만, 웃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었다.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김성남씨의 연애행각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는 건, 그녀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어올 것 같아 두려웠다. 김성남 주변의 끊이지 않는 여자들에 대해 부럽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자생산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도 없을 테고, 하다못해 나의 짧은 영화적 식견으로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읊어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마냥 웃었다. 종종 그녀도 웃는지 흘겨봤다. 그녀도 웃으며 보는 듯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자, 둘 다 웃음과 할 말을 잃었다. 웃으며 봤어도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다. <밤과 낮>을 보고선 하다못해 서로를 더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담배를 물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하기도, 시원한 맥주를 한잔 하자고 하기도 뭔가 어색했다.

우리는 일단 걸었다. 걷는 도중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김성남씨를 따라해보고 싶었던 나는 술 취한 김성남씨가 역시 취한 유정과 함께 걸었던 모습처럼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니, 나이도 많으신 분이 왜 이러세요.” 둘 다 웃었고 그 순간 나는 올해 여름휴가를 파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밤과 낮>을 촬영한 파리 14구 알레지아의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오르셰 미술관에 가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을 보고, 김성남이 유정과 앉아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보낸 뒤 밤이 되면 낮에 살고 있을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운전을 하다 짜증을 내던 현주처럼 진저리를 쳤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할지 다시 고민했다. 생각을 해야 해, 생각을. 다행히 그녀가 먼저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굴을 파는 술집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는 <밤과 낮>을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웬만한 로맨틱코미디보다 낫지 않은가.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나면 따라해볼 수밖에 없는 의식과도 같은 행동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아, 혹시 이런 게 극장전(劇場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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