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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사람 잡는 영화규제법
이영진 2008-07-10

60년대 중반 대명(貸名) 제작 횡행 등 심각, 감독들 생활고 비관 자살 잇따라

“세 아들을 기를 수 있겠소? 나 없이도 말이요.” 거처도 알리지 않고 몇달 동안 떠돌다 슬그머니 돌아온 남편의 뜬금없는 물음에 부인 이씨는 아무 말도 못했다. 괜한 소리 말고 어서 노곤한 몸 뉘이라고 안방으로 밀었을 따름이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무슨 일 때문인지 서둘러 광희동 집을 떠났다. 어디로 가시오, 언제 오시오, 물어볼 참도 없었다. “벗은 옷 빨 필요 없으니 그냥 두구려.” 이틀이 채 되지 않아 이씨는 남편 소식을 들었다. 죽었다고 했다. 남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종로구 삼청공원 안이었다. 남편은 집에서 들고 간 빨랫줄로 소나무에 목을 맸다. 호주머니에는 시계를 판 돈 3600원이 있었다. 생활비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장례비 걱정까지 맡길 순 없다는 남편의 마음이 느껴져 이씨는 진저리, 몸서리쳤다.

노필 감독이 세상을 끊은 건 1966년 6월29일 새벽이었다. 노 감독의 부음에 충무로도 발칵 뒤집혔다. <안창남 비행사>(1949)로 데뷔한 그는 <사랑이 흘러가도> <꿈은 사라지고> <검은 상처의 부르스> 등 “17년 동안 3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한국영화감독사전>에 따르면, 연출작은 16편이다). 스타 감독은 아니었으나 “매년 1∼3편씩 내놓던” 중견 감독으로, 애정통속물이 많았다. <꿈은 사라지고>에서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고, <밤하늘의 블루스>에 출연했던 최무룡은 노 감독의 죽음을 두고 “흥행엔 성공한 것이라 돈을 모은 줄 알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불과 석달 전 평소 연출하고 싶어했던 음악영화 <밤하늘의 블루스>를 내놓았고, 국도극장에서 9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뒀음에도 그는 왜 “많은 부채를 갚을 길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의 선택을 내린 것일까.

“죽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을 벼랑으로 내몬 것은 정부의 무리한 정책이었다. 당시 영화인들은 “영화규제법의 모순과 제작자들의 횡포”가 노 감독의 숨통을 뺏었다고 분노했다. 억지 꿰어맞춤은 아니었다. 영화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업형 영화사의 육성 방침에 따라” 1963년 마련된 영화법 제1차 개정안에 따르면 극동, 범아, 한양, 동성, 한국영화, 신필름 6개사만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이들 영화사들이 정부가 기대한 편수(연간 15편)만큼 영화를 제작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대명(貸名) 제작의 횡행을 낳는다. 부당하게 높게 책정된 제작수수료 및 시설이용비를 감당하면서도 군소영화사들은 생존을 위해선 ‘대명’을 대명(大命)처럼 받아들였다. 전주들과 등록제작사들이 거부하는 음악영화를 끝내 만들고 싶어했던 노 감독으로서도 직접 제작에 뛰어들어 이름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66년은 대명 제작을 위한 군소제작사들의 경쟁이 극에 달했다. 공보부는 1966년 1월 영화시책을 통해 제작편수 과잉이 졸작을 양산한다며 연간 제작편수를 120편으로 정한다. 군소제작사들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수수료는 껑충 뛰었다. <밤하늘의 블루스>가 흥행을 했음에도 노 감독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더욱 충격적인 건 “감독이란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며 이 시기 목숨을 스스로 버린 감독이 노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환희를 누렸을 1960년대 중반, 김용덕, 김을백, 윤대중 등의 감독들은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을 택했다. 자살이 아니라면 “최하 5만원의” 연출료(이에 대한 과세는 무려 60%였다)를 받고 1년 동안 1, 2편 연출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배우는 자가용 타고, 제작자는 합승을 타고, 감독은 걸어서” 촬영장에 간다는 유행어는 우스개가 아니었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1966년 여름 히트했던 최희준의 <하숙생>이다. 혹시 노필 감독이 파고다담배를 피우며 마지막에 읊조렸던 노래는 <하숙생>이 아니었을까. 강대진, 김수용, 김기덕, 정진우 등과 당시 30대 젊은 감독들과 함께 신우회를 만들어 친목을 다지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동료가 영화화하기도 했던 <하숙생>의 2절을 미처 다 부르지 못하고 저승길에 올랐을 것이다. 1960년대는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맨발의 영화 청춘들에겐 끔찍한 수난시대였을지도 모른다.

참조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한국영화정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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