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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미래의 배우들이여, 자나깨나 변태조심!
이영진 2008-08-07

1960년대 신인 여배우의 성공 신화 이면에 드리운 배우 지망생들의 수난기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중 모 신문에 ‘oo만원 개런티 여배우 모집’이라는 광고가 났다. 읽어볼수록 호기심을 자극하여 마침내 용단을 내려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200원짜리 소정 양식원서를 써놓고 심사를 받은 다음 또 5천원씩을 내고 2차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결국 최종 몇명 탄생한 배우 속에 내가 끼었을 때는 하늘로 날 듯이 기뻤다. 모든 행운이 나를 향해서 손을 벌린 듯…. (후략)” 1966년 11월2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의 일부다. 충북 괴산군 증평읍 사곡리 출신인 그녀가 스타탄생을 꿈꾸고, 러키 서울을 외치며, 희망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면, 뜬금없이 자다 말고 신문사 봉창을 두드렸겠는가. “대작이라는 영화 촬영을 시작하여 몇컷 찍고는 자금 부족이니 좀 기다리라고 우물쭈물 며칠을 미루더니 감독이며 기사며 모두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직업사기꾼들에게 뒤통수 맞고 빈털터리가 된 그녀, 밤안개 뚫고 달리는 귀향열차에 올라 “허영에 들떴던 자신을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 중반은 단박에 부귀를 낚아챈 신인 여배우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바 걸 같은 단역”으로 얼굴을 비춘 것이 연기 경력의 전부이던 여대생 이민자는 1965년 연방영화사 주최 오디션에서 “50만원이라는 전례없는 막대한 개런티”를 거머쥐며 선망의 이름 남정임으로 다시 태어났다. 같은 해 데뷔작 <유정>과 <학사와 기생> 단 두편으로 남정임은 서울에서 4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으니, 데뷔와 동시에 1급 스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했다. 달이 기우니 그 빈자리에 해가 들어선 것인가. 조미령이 스캔들에 휘말리고, 최지희가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언한 1965년, 정진우 감독의 고은아(<란의 비가>)가 떴고 이만희 감독의 문희(<흑맥>)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윤정희가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50만원 개런티의 신데렐라”가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대생 딱지밖에 없었던 초짜 여배우들, 이제 돈방석 위에서 화투패를 맞추며 행운을 놀리는 팔자를 맞는다.

신인 여배우들의 전성시대는 그러나 배우 지망생들의 고난시대이기도 했다. 제대로 간판을 내건 배우전문학원이 서울에만 무려 10여개소에 이르렀다는 당시 신문기사는 영화(映畵)로 영화(榮華)를 누리는 여배우들에 대한 선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순진무구 처녀들의 신분상승 열망은 동시에 ‘영화배우 모집’을 앞세운 어이없는 신종 사기 범죄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1966년 12월7일자 <신아일보>에 따르면, 36살 김흥섭은 “내가 바로 동포 출신 감독 문여송”이라고 사칭해 27명의 남녀 배우지망생들을 철저히 유린했다. 3개 신문에 <피와 살>이라는 영화 제작에 들어간다며 배우모집 광고를 냈고, 몰려든 지망생들에게 “1인당 5천원씩”의 교육비를 받아 챙겼다. 서울시 교육위원회 별장을 빌려 배우 합숙소를 차린 그의 엽색 행각은 특히 9명의 여배우 지망생들에겐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정조를 생각하는 배우란 있을 수 없다”는 괴이한 연기론을 십계명처럼 내세우며 신체검사 및 애무장면 연습을 강요했고, 그보다 더한 성추행을 저질렀다.

배우지망생들을 상대로 돈 뺏고, 몸 뺏고, 마음의 생채기를 내는 파렴치범들로 인해 이름을 도용당한 감독들 또한 궁지에 몰리는 일이 허다했다. 가짜 문여송과 경찰서에서 대면한 진짜 문여송 감독은 “몸만 망쳐놓고 이제 와서 이러기냐”며 난데없는 협박편지를 “올해 들어 벌써 3번째”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9월 정진우 감독 또한 직접 종로경찰서에 가짜 정진우 감독을 앞세우고 나타나 “동료에게 내 처제까지 더럽힌 놈”이라고 따귀를 맞았다는 진술까지 내놓았다. 웃지 못할 과거지사로 갈음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상은 더욱 ‘숭악’해졌고, 흉악한 범죄는 여전히 기승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 자유마당에 최근 올려진 한 제보. 택시 타고 다니며 회장님이라고 자칭하는 61살 최상영(글쓴이는 이름 또한 가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씨의 사기행각에 관한 고발인데, 최씨는 영화 출연을 약속하며 나이 어린 여배우 지망생들의 ‘피와 살’을 갈취하고 있다 한다. 그러니 미래의 배우들이여,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수업>을 외기 전에, 복창하고 명심하라. ‘의심나면 다시보자, 자나깨나 변태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