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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공식 소개팅
고경태 2008-10-31

소개팅인가요? 어색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차가운 ‘얼음’을 깨야 할까요. 일대일 만남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건 아예 불특정 다수인 수만명 독자와 인사를 나누는 소개팅이군요.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씨네21> 편집장을 맡아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한달 전 편집장에 내정된 뒤 지인들에게 받은 질문은 마치 소개팅 자리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저를 잘 알거나 모르거나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으니까요. “영화 좋아하세요?” 정말 분위기 썰렁하고 할 말이 없을 때 그렇게 상투적으로 묻지 않습니까? 소개팅에도 안 나갔는데 그런 ‘클리셰’형 물음에 시달린 이유가 있습니다. 저에겐 영화 기자의 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호 007 특집기사를 보니 <퀀텀 오브 솔러스>의 감독인 마크 포스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역대 007 시리즈 감독 가운데 액션영화 연출 경력이 전무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역대 <씨네21> 편집장 가운데 영화 관련 경력이 유일하게 전무합니다.

1994년 2월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창간 취재·편집팀에 경력기자로 들어왔습니다. 기자로, 편집자로, 기획자로, 잡지쟁이로 12년8개월을 일했습니다. 마지막 1년6개월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그 뒤엔 <한겨레>로 옮겨 생활문화매거진섹션 <esc> 창간을 주도했습니다. 거기서 또 2년을 보냈습니다. 한겨레적 시대정신을 집요하게 추구하다 돌팔매를 맞기도 했고, 한겨레 안에서 전혀 한겨레적이지 않은 매체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겨레에서 15년 동안 새로 창간하는 매체나 섹션에서만 일했습니다. 남들이 만들던 매체로 중간에 옮기는 일은 참으로 새롭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하던 추억이 떠오를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씨네21> 독자들과는 구면입니다. 제가 소통했던 <한겨레21>이나 <esc> 독자들만큼이나 친숙합니다. <esc>를 만들면서 <씨네21>에 1년6개월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칼럼을 썼습니다. <한겨레21>에 몸담던 와중에도 4년 넘게 어떤 칼럼의 필자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독자들을 만나뵙게 된 셈입니다.

물론 영화판은 생소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릅니다. 한국영화의 위기와 해법이 어쩌고 하면서 억지로 아는 흉내를 낼 마음은 없습니다. 모르니까 하나씩 차근차근 배워나가겠습니다. 저에게 요구되는 건 잡지 코디네이터로서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잘해온 <씨네21>이 더 잘하도록 길을 찾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잡지적 완성도를 더 높일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하고 더 흥미있게 콘텐츠를 꾸밀지가 앞으로의 고민입니다. 잡지는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의 허를 찌를 수 있다면 더 재미있고 신나겠습니다. 아무튼 새로운 앵글을 찾는 카메라 감독의 마음가짐으로 <씨네21>과 영화판이라는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겠습니다.

저는 사명감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불타는 사명감이라면 금방 불타버려 재가 됩니다. 차라리 ‘상도의’라는 말이 적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보’라는 말보다는 ‘상식’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상식을 갖추되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잡지를 만든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연금술사>의 지은이 파울로 코엘료에 따르면 “간절히 상상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데 우주가 진짜 협조를 할까요?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상준(주진모)은 한나(김아중)에게 말합니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가? 잘하는 게 중요하지.” 이 말을 제 가슴에 비수처럼 꽂습니다.

마지막으로, 13년6개월간 <씨네21>의 거대한 우산이었던 남동철 전임 편집장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산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