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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송혜교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송혜교의 발음이 문제가 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전 그렇게까지 대사 귀가 밝은 편이 아니라 종종 영화를 볼 때 애를 먹는데,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서 송혜교가 하는 대사를 못 알아들은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다 알아듣겠더란 말입니다. 이보다 발성이 더 불안한 배우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다소 혀가 짧게 느껴지기도 하고 대대거리는 인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냥 배우의 개성으로 받아들일 만한 정도는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김명민처럼 명확한 발성을 할 필요도 없고 명확한 발성으로 하는 연기가 모두 좋은 연기인 것도 아니죠. 특히 드라마와 영화에서는요. 그런 개성이 방송국 PD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과 어울리지 않는가? 그것도 너무 단순한 질문입니다. 설마 세상 방송국 PD의 성격이 모두 똑같은 건 아니겠지요. 송혜교의 캐릭터 준영이 어떤 인물이고 그 성격이 배우의 개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알려면 드라마가 조금 더 진행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시청자나 관객이 이런 가장 기초적인 문제를 이유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배우들의 매너리즘을 지적한다면 그게 정말로 연기문제인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미지의 문제죠. 대중이 슬슬 그 배우의 고정된 이미지에 익숙해지고 지겨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들이 아주 빨리 일어나죠.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성미가 급한 민족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송혜교는 다소 위험한 위치에 있는 배우입니다. 이 사람의 이미지는 존중받기 힘들어요. 지금까지 작고 귀엽고 여우 같은 여성적 이미지로 버텨온 건 좋은데, 이건 지나치게 안전해요. 역시 여성적이고 여우 같은 이미지인 손예진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연기의 질을 떠나 손예진은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보여요. 속에 주체적인 배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송혜교는 (역시 연기의 질을 떠나) 그냥 그 사람이 속해 있는 환경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정말 귀엽고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시청자는 그걸 연기로 안 보죠.

이런 경우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성격부터 다릅니다. 좋은 연기는 종종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면 그럼 곤란하죠. 관객은 오히려 지나치게 튀어 전체적인 균형을 깨트리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연기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지난 몇년 동안 송혜교가 배우로서 존중받기 위해 택한 것은 두편의 영화였습니다. 둘 다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죠. <파랑주의보>는 나쁘다기보다 평범하고 지루한 영화였고, <황진이>는 시작부터 계산 착오였어요. 둘 다 연기를 보여주는 데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파랑주의보>에서 송혜교가 한 것은 전형적인 송혜교식 여우 연기였습니다. 그 작품 하나만 본다면 매력적일 수 있지만, 송혜교의 이전 작품에 익숙한 대부분의 시청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의욕까지 느끼지는 못했죠. <황진이>는 아까도 말했지만 계산 착오였습니다. 주인공 기생보다 옆에 있는 액션 머슴이 더 튀는 영화를 택하면 아무리 연기를 해도 잘 안 보일 수밖에 없죠. 기존 이미지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벅찬데, 캐릭터가 대중이 이미 가진 이미지의 힘을 따라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시청자의 존중을 얻으려는 송혜교의 가장 최근의 시도입니다. 캐릭터의 나이는 올라갔고 고민도 현실 세계를 사는 어른들의 것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배우가 너무 어려 보이고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 세계라는 공간이 지나치게 예쁘고 깔끔해서 아직까지는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16회를 지나면서 송혜교가 뭔가를 얻는다면 모두를 위해 좋겠죠. 문제는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어떤 모습일지 저에겐 전혀 상상이 안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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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임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