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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인상주의, 초현실주의를 만나다

<라탈랑트> L’Atalante, 장 비고, 1934

장 비고의 아버지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였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장 비고는 늘 어딘가로 도주하는 삶을 살았다. 결국 아버지는 체포된 뒤 감옥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는데, 어린 비고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 아버지를 잃은 비고는 기숙학교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홀로 자랐고, 그때의 경험을 <품행제로>(1933)로 남겼다. 여기엔 통제에 반발하는 아동들의 반항기가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품행제로>가 비고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그의 대표작 <라탈랑트>(1934)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 제도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영원한 자유주의자 아버지의 초상이 암시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 아버지의 초상

영화는 센강을 오가는 화물선 ‘라탈랑트’호의 선장 장(장 다스테)과 그의 신부 줄리엣(디타 파롤로)의 선상에서의 신혼생활을 그린다. 이들의 결혼으로 시작하여, 오해에 따른 갈등, 그리고 재결합이라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센강의 아름다움, 파리의 화려함, 그리고 흥겨운 샹송과 어우러져 <라탈랑트>는 낭만적인 로맨스를 그린 프랑스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종종 소개된다.

이런 낭만성은 인상주의 특유의 화면과 만나 몽환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부두의 자욱한 안개, 센강의 앞이 보이지 않는 밤안개, 감정의 변화를 잡은 얼굴 클로즈업, 현기증나는 기분을 담은 아웃 오브 포커스, 긴장감을 주는 트래킹, 꿈꾸는 듯한 이중노출, 그리고 리드미컬한 카메라 움직임 등 인상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온갖 테크닉이 모두 동원된다. <라탈랑트>가 인상주의의 대표작이라는 평가가 허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비고는 더 나아가, 막 영화로 진입하기 시작했던 초현실주의까지 끌어들인다. 비고가 초현실주의에 눈뜨게 된 데는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브뉘엘의 작품에서 비고가 주목한 점은 ‘꿈과 에로스’다. 두 요소 모두 근본적으로는 현실을, 다시 말해 제도를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사회의 억압적인 금지는 에로스에 대한 탄압으로 집약되고,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제도를 불편하게 만드는 에로스를 찬양했다. 그리고 꿈은 늘 현실의 저쪽에서(超현실) 현실의 허점을 비쳐주니, 이것도 반제도의 강력한 요소로 수용됐다. 반(反)제도, 이것은 바로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를 불러내는 주술적인 단어이다. 그 주술을 비고는 화물선의 노선원인 쥘(미셸시몽)에게 주입했다.

쥘 역의 미셸 시몽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1932)에서 부르주아 관습을 경멸하는 부뒤로 나와 이미 반부르주아, 반제도의 상징적인 배우로 각인됐다. 그가 <라탈랑트>에선 선장을 보좌하는 늙은 부선장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는 바로 반제도에 대한 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비고 아버지의 초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선장 장은 신부 줄리엣과 함께 남들과 같은 가정을 꾸미고 싶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어깃장을 놓은 인물이 바로 쥘이다. 그는 신혼부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줄리엣의 성적 라이벌로 기능한다. 물론 노골적인 건 아니고, 이를테면 부부가 체조를 하고 있을 때, 옆에 나타나 그레코로망 레슬링 솜씨를 격렬하게 보여주는 식이다.

결혼을 위협하는 ‘리비도의 방’

그가 제도의 최고의 상징인 결혼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그의 방에서의 줄리엣과의 만남이다. 바로 직전에 줄리엣이 재봉틀을 돌리는 것(성적 행위의 암시)을 보고 위험할 정도로 성적 호기심을 표현한 뒤다. 그의 방은 ‘리비도의 전시장’이다. 남근과 섹스를 상징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상아, 칼 같은 긴 물건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고, 이런 남근의 상징들은 포르노에 가까운 여성 누드 사진들과 뒤섞여 그의 방은 ‘혼돈’ 그 자체다. 더 나아가 쥘의 몸은 온갖 문신으로 뒤덮여 있는데, 그는 막 결혼한 신부 앞에서 배꼽에 담배를 꼽고 피워대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성행위의 암시이고, 배꼽 부위에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구강섹스를 상징하는 동작이다. 여기에 장이 갑자기 들어와 이런 물건들을 다 때려부수는 것은 신랑으로선 당연한 일인 것이다.

에로스뿐만 아니라 꿈도 주요한 요소로 쓰였다. 부부가 오해로 떨어져 있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방을 꿈꾸며 성적 쾌락을 느끼는 교차편집 장면, 그리고 아내가 보고 싶어 센강에 뛰어든 장의 눈앞에 신부가 유령처럼 나타나 춤을 출 때의 이중노출은 초현실주의 미학의 전범으로 소개되는 부분이다. 초현실에서 끌어온 ‘에로스와 꿈’은 제도의 억압을 비틀며, 인상주의의 카메라를 만나 더욱 풍부한 상상을 자극한다. 여기에 제도에서 비켜난 인물인 쥘의 존재가 그 의미를 중층화하는 것은 물론이다.

영화는 결국 두 부부가 화해하는 것으로 봉합된다. 하지만 관객이 초현실적 혼돈의 유혹을 모두 맛본 뒤다. 그리고 그 봉합에도 ‘위험한’ 에로스가 살짝 끼워져 있다. 운하 위를 시커먼 긴 배가 미끄러져 가는 것을 하늘에서 찍은 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의 마지막 장면, 곧 터널 속으로 기차가 들어가는 장면보다 더욱 상징적인 성행위의 암시이다.

다음엔 프로이트적 에로스와 갱스터의 결합인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Scarface, 1932)를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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