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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야간통금

“현실성은 없지만 최악의 경우 야간통금을 불사할 수도 있다는 비상한 각오와 의식으로 임해야 하는 게 아니냐.” 지금 청와대 일각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단다. 자기들 스스로 “현실성은 없다”고 하지만, 언제 MB 정권이 현실적이었던가? 이 정권하에서 우리는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초현실주의 현상들을 이미 충분히 보았다. “비상한 각오와 의식”으로 생각해낸 게 야간통금. 텅 빈 ‘의식’이 ‘비상’하게 하는 ‘각오’만큼 끔찍한 게 또 있을까?

2009년 3월의 어느 날 밤 열두시. 전국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진다. 서울 시내의 주요 도로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골목은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로 가득 찬다. 전국의 도시는 경찰과 시민들이 쫓고 쫓기는 거대한 술래잡기 놀이판이 된다. 경찰서에는 술김에 귀가 시간을 놓친 취객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고, 파출소의 철장 너머로는 데이트를 하다가 얼떨결에 끌려온 젊은 남녀의 모습도 보인다.

새벽에 교대를 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칼잠을 자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전국의 상점과 음식점은 열두시가 되면 일제히 셔터를 내리며, 24시간 편의점들은 부랴부랴 ‘20시간 편의점’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자정이 다가오면 택시 운전사들은 장거리 손님의 승차를 거부하고, 거부당한 승객은 필사적으로 “따블, 따따블!”을 외쳐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대책으로 시행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대체 뭘 걱정하는 걸까? 정말로 경제를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야간통금을 실시하면 그나마 침체된 경기가 더욱더 침체할 테니까. 언제더라? “상황이 매우 엄중하고, 내년 3, 4월이 되면 더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던 대통령 실장의 말씀이 힌트가 될까? 듣자하니 이분은 “내년 2월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지고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게 되면 국정운영이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단다. 이걸로 보아 또다시 촛불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야간통금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역으로 저분들이 실은 얼마나 심리적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지 보여준다. 달랑 미국산 쇠고기 문제 하나로 수십만명이 촛불을 들었으니, 경제파탄이라는 유물론적 이슈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면 그 위력이 가공할 것이라는 두려움. 바로 그 공포감에서 부랴부랴 ‘야간통금’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상까지 다시 끄집어든 것일 거다. 저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걱정하는 것은 경제위기가 아니라 정치위기로 보인다.

경제가 어렵기는 전세계가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책을 놓고 이렇게 우왕좌왕하며 허둥대는 정권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뒤늦게 IMF 한국의 전철을 밟는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어디를 가도 경제가 어렵다고 정권이 이렇게 심리적 패닉에 빠진 나라도 없다. 이명박씨와 비슷한 20%대의 지지율로 ‘좀비 정권’이라는 평을 들으며 붕괴 위기에 처한 아소 내각에서도 이런 호들갑은 떨지 않는다.

경제위기가 고스란히 자신들의 정치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것을 보니 이 위기의 책임이 자신들의 실정 무능에 있다는 사실을 자기들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경제위기를 스스로 극복할 능력은 없고, 그래서 그것의 정치적 표현인 민란(?)부터 걱정하는 것이리라.

전여옥씨던가? 노무현 정권 때는 국체가 흔들렸지만, 이명박 정권하에서는 경제만 흔들릴 뿐이라고 했던 것이. 하긴 야간통금은 강력한 안보체제의 필수요인이 아니었던가? 경제는 흔들릴지언정 야간통금으로 국가만은 (네 시간 동안) 확고히 안정된 나라. 그게 이명박 정권하의 대한민국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