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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가 만난 사람] 영화인 방은진
김혜리 사진 이혜정 2008-12-25

고독을 먹고 자란 카리스마

“나는 카메라와 친해지고 싶었고 나아가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대상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표현할 길은 묘연했고 멀게만 느껴졌다.” 1999년 출간된 <스크린 연기의 비밀> 역자후기에서 배우 방은진이 고백했을 때만 해도 그녀가 그 사랑에 얼마나 집요할 수 있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책을 번역한 그해, 한때 ‘제2의 윤석화’라 불렸던 여배우는 김진한 감독의 단편 <장롱> 연출부로 뛰어다녔다. 맷돌처럼 무거운 6년의 시간이 굴러갔고 그녀의 첫 장편 <오로라 공주>(2005)가 세상에 나왔다. 다시 두 번째 장편을 더디게 산 위로 밀어올리는 2008년 12월 현재 방은진이 감독하거나 출연한 독립영화는 열편을 헤아린다. 방은진은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어떻게 이루었느냐가, 낱낱의 성취보다 그려온 궤적이 한층 주의를 사로잡는 인물이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가 아는 방은진을 “하고 싶은 일을 정하면 조금씩 이루어낸다. 실패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명계남 이스트필름 대표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무작정 연출에 뛰어든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세부적인 준비를 하고 지식을 쌓았다. 남의 자본을 갖고 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에 대한 책임감도 또렷하다.”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은 철없는 인물들을 교통정리하는 성은교 역에 방은진이 더할 나위 없었다고 말한다. 40대이면서 여전히 아름답고, 위엄을 간직하고 있으며 클라이맥스 장면을 ‘주재’할 만한 카리스마를 보유한 배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드라마 <바보같은 사랑>에서 바람 피우는 남편을 바라보다 심장에 못이 박힌 아내나 <학생부군신위>의 심성 고운 며느리를 기억하는 관객은 성마른 카리스마가 방은진의 전부가 아님을 알 것이다. “비련의 가냘픈 모습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것이 내게서 떨어져나간 느낌이 있어요.” 헤어진 친구를 추억하듯 방은진은 말한다.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출연작 <스물넷>에는 기억할 만한 순간이 있다. 유부녀 구청공무원 미영(방은진)은 스물네살 공익근무요원 준(김현성)과 몰래 정사를 벌인다. 어느 날 그녀는 모텔 방에서 처녀 시절 ‘목화 아가씨 선발대회’에서 입었던 파란 수영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다. 미영은 과거로 돌아가 청년과 사랑하고 싶지만 소집해제를 앞둔 젊은 남자에게 그녀는 간이역일 뿐이다. “이 기쁨을 누구와 나누겠습니까?”라는 준의 질문에, 미영은 순간 장난기를 거두고 답한다. “준이한테요.” 방은진의 짧게 떨리는 대사에는 청년을 겁주어 도망치게 할 만한 엄숙한 진실과 견딜 수 없는 연약함이 응어리져 있다.

방은진은 대중의 애인이었던 적이 없다. 영화배우로서 만개할 기회도 길게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이창동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처음부터 여배우라기보다 전문 연기자로 대접받았다.” 남들이 마다하는 까다로운 역을 소화했고 연출자로 전신한 뒤에는 자기가 들어앉을 세계를 스스로 지어올려야 했다. 푸념할 만도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도 뒤에서도 방은진은 보호가 필요없어 보인다. 그것은 독하고 강인하다는 인상과는 다르다. 심지어 <태백산맥>의 외서댁처럼 가련한 처지에 있을 때조차 방은진이 연기하는 여자들은 그들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것이 거의 자연의 섭리처럼 보인다. “아마 내게서 묻어나는 걸 수도 있고. 내가 그 인물에 다가가면서 넌 너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해라고 판단한 걸 수도 있죠.” 방은진은 사석에서 스탭들을 ‘우리 새끼들’이라 불렀다. 엄마의 정이 아쉬우면 자기 안의 모성을 깨우고, 애인이 없으면 대장부 기질을 발휘하고 가족이 없으면 영화 동료들과 살갗을 부대끼면서 그녀는 걸어왔다. 매우 외롭고 동시에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과의 만남은 겨울날 외투 주머니에 든 따뜻한 커피캔 같았다. 인터뷰를 마친 일요일 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를 뒤뚱거리며 나는 그것을 어루만졌다. 외톨이 발자국이 총총히 뒤를 따라왔다.

-인터뷰 사진 촬영 장소를 의논드렸을 때 충무로 거리를 제안하셨는데요. 방은진 감독님에게 충무로의 추억은 무엇인가요? =제가 처음 영화를 시작한 1994년 무렵만 해도 메인 개봉관의 개념이 있었어요. 개봉 주말이면 서울극장이니 단성사 앞 자장면 집에 앉아 관객이 얼마나 줄 서나 지켜보았죠. 태어나서 처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를 본 장소도 충무로 극장이었고요. <301·302>의 세트 촬영은 남산 영화진흥공사 세트에서 이뤄진 마지막 촬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참, 그때 설치미술하는 최정화 작가가 처음 영화미술을 하다보니 댕깡(촬영을 위해 한쪽 벽을 뜯어내는 작업)도 안되는 세트를 짓고 몽땅 반사되는 알루미늄을 바닥재로 써서 난리가 났었지…. (좌중 웃음)

-<미쓰 홍당무>의 성은교 역으로 오랜만에 상업영화에 얼굴을 보였습니다. 시사회와 인터뷰에서 “연기도 안 하니 녹이 슬더라”고 말씀하시던데,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나요? =그것은 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 말이에요. 정말 연기의 감이 무뎌져 어려움을 겪은 건 앞서 <도구>(2006)라는 단편을 찍을 때였어요. 첫 촬영에서 차 옆자리에 황기석 촬영기사님이 탔는데 카메라가 날 쳐다보는 상황이 미칠 것 같은 거예요. 나, 이제 연기는 못하나보다 싶었죠. 한번은 잘 안되니까 감독보다 먼저 “아이씨, 컷!”을 외쳐버렸어요. (좌중 폭소) 물론 나이 든 연기자 선배님들이 직접 컷을 외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당시 <오로라 공주> 연출한 지 얼마 안됐을 때라 민망했죠. 이듬해 대학원 작품인 <블리치>에 출연했는데 그때는 카메라에 잡히는 내 존재감도 충분히 파악되고 집중도 되더군요. 이래서 우디 앨런이,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를 겸하는구나 알겠더라고요.

-현재 규칙적으로 하시는 두 가지 일이 서울예대 강의와 교통방송 <밤으로의 여행> 진행입니다. 두 가지 일이 어떤 필요를 채워주나요? =제일 큰 것은 경제적 부분이죠. 라디오는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살리고 있어요. 나를 붙박아두는 일이 생기니 여행도 가지 못하고 힘겹지만, 저의 생체리듬과 무관하게 게스트를 만나 밝게 웃고 상대의 마음을 살펴 질문을 던지는 시간 동안은 다른 고민을 접을 수 있어서 제가 밝아졌어요.

-꼬박꼬박 청취자 글에 리플도 달아주시고 오붓한 분위기라 옛날 FM을 듣는 것 같더군요. =중간에 저의 팬 카페가 생기더니 요즘은 분란도 생겼어요. 안티가 생기는 걸 보니 드디어 방은진 인기가 생겼네 농담도 했어요. (웃음)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살면서 잘 알지 못했던 택시, 버스, 트럭 기사님과 그 가족분들, 수험생들을 접하게 되니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 같아요.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워요. 서울예대 강의는 <스크린 연기의 비밀>이라는 번역서가 계기가 되어 카메라 연기를 6년째 가르치고 있어요. 연극과, 영화과, 방송연예과 친구들이 수강하는데 25명 정원에 서너 배수가 신청하기도 해요. “내가 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 지론은 연기는 가르칠 수 없다는 거야!”라고 소리치죠. (웃음)

늘 그리우면서도 너무 멀었던 어머니

-<자기만의 방>이었던가요? 언젠가 연극무대에서 본인의 가정사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5살에 어머니와 헤어졌고 친척집에서 유년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모녀 사이인가요? =비슷한 점이 많은데 서로 잘 맞지 않는 사이예요. 대여섯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헤어졌는데, 서로 키우겠다고 하셔서 이쪽저쪽으로 유괴당하기도 했어요. (웃음) 아빠랑 살다가 제가 15살이 된 1977년에 엄마가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죠. 엄마와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서로 인격체로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엄마는 늘 그리운 존재인데 다가가긴 너무 멀고 손을 뻗쳐도 닿지 않았어요. 그런 것, 있잖아요? 결국은 엄마가 키우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시고 날 다시 아빠에게 돌려보냈어요.

-10대에게는 힘든 급작스런 환경 변화였을 텐데요. 한국에 돌아오는 데 동의하셨어요? =적응력은 뛰어나서 어디 가도 생존해요. 돌아오고 싶진 않았어요. 판단은 엄마가 한 것이고 고작 16살인 저는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죠. 어쨌든 떨어져 자랐어야 할 팔자인가보다 생각했는데 그 일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외할머니 손에서도 크고 고모 손에서도 컸는데 하도 이집 저집 다녀서 어디서 어느 시기를 보냈는지 기억이 흐릿해요. 초등학교 3, 4학년 때 혼자 목욕탕 가는 게 굉장히 싫었던 기억이 있어요. 넌 왜 혼자 왔니, 등 밀어줄까 하는 소리 듣는 게 무척 싫었어요.

-엄마한테서 이어받은 면이 있다면 뭘까요? =둘 다 남들 못 퍼주고 못 챙겨줘서 안달하는 성격인데 둘이서는 2주 이상 같이 보내면 언성이 높아지고 싸워요. (웃음)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어요. 용인에 살다가 올해 초 부천 막내이모집 근처로 이사한 일이 처음으로 제가 엄마 말을 들은 경우예요. 외로움이 병이 될 거 같다고 제발 사람 많이 사는 동네로 나오라고 하셨죠.

-KBS 어린이 합창단 경력이 있으시던데요? =TV를 보다가 하고 싶다고 하니 아버지가 응시원서를 갖다주셨어요. 혼자 시험치고 혼자 방송국도 다녔는데 치맛바람이 없으니까 나중에 좀 천대를 받더라고요. 그 무렵 어린이 드라마 출연도 조금 했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저 이제 공부할래요” 하고 스스로 그만뒀어요.

-또래들과 다른 환경이라는 걸 의식 안 할 수 없었겠어요. 친구 관계는 어땠습니까? =친구들이 뭔지 모르게 저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일이 많았는데 저는 늘 뿌리쳤던 것 같아요. 미국 가기 전까지는 모범생이어서 학생회장도 했는데 그때도 부모님이 와서 뭘 해줄 수 없으니까 감투도 싫었어요. 미국을 다녀오니 학기가 안 맞아 1년 늦게 여고에 진학했는데 만날 연극 보러 다니고 책 읽고 나이트클럽 가고 그랬어요. 학교생활은 제대로 안 하지만 또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도 아니었죠. 고등학교 가서는 연극반 활동하는 재미로 다녔어요. 남자 역할을 하면서 인기가 높았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가야 한다는 자각이 확고했을 것 같네요. =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빨리 벗어나는 것이 살길이라고 일찍부터 생각했어요. 별것도 없으면서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최면으로 지탱했던 것 같아요. 연극이 좋으니 연극을 하고 살아야겠다고 고등학교 때 결심했죠. 잡지에서 배우 김금지 선생님 구둣가게나 김아라 연출가의 옷가게 기사를 보면서 연극은 배가 고프니까 생계수단을 따로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국민대 의상학과에 간 거예요. 대학교 4학년부터 직장에 다녔는데 1년 다녀보니 디자인이란 것이 그 일만 몰두해도 힘에 부치겠더라고요. 그래서 1988년에 사표를 썼죠. 시민회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 중이던 민중극단을 찾아갔어요. 포스터 붙일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속으로 ‘연극하러 왔다는데 왜 포스터 붙일 수 있냐고 물어본담?’ 하고 했죠. (웃음) 1989년 <처제의 사생활>(원제 Table Manners)로 무대에 처음 섰어요.

-1990년에 민중극단을 나와서 독립하셨는데요. 홀로 서는 시점을 어떻게 판단했나요? =잡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동인 시스템의 극단이 연기 아닌 일로 사람을 소모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극단이란 조직이 좀 재미없었나봐요. 술 마시다 일찍 가면 간다고 욕먹고, 남으면 눈치없다고 눈총 주고, 매표소 들어가는데 반바지 입고 왔다고 야단치고. (웃음) 매표소 박스가 얼마나 더운데! 아무 보장도 없었지만 보따리 싸고 나왔어요.

-하긴 거의 혼자서 살아온 셈이니 극단 생활의 스트레스가 있었을 법도 하네요. =호오가 극명했던 시절이에요. 그래서 초창기에 최종원 선배가 “은진이 너 연기에는 생활이 얹히지 않으면 한계가 올 거다”라고도 충고하셨어요. 연기에 인간적 부분이 하나도 없었던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연기를 한 최초의 동기가 내가 너무 싫어서, 나를 떨쳐버리고 잠깐이나마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였거든요. 자꾸만 역할 속으로 숨었어요. 연기는 잘 숨으면 숨을수록 잘했다고 칭찬받거든요. 그러다 연출을 시작하니까 뒤집어서 나를 자꾸 똑바로 봐야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배우하다 감독으로 넘어가며 버텨낸 시간이 그래서 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연출로 넘어가며 버텨낸 시간이 굉장히 중요

-학전 멤버 가운데 가장 먼저 돈을 번 배우라는 예전 기사를 보았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덕분인가요? =그렇죠. 박광수 감독의 영화를 좋게 보았던 터에 연락을 받고 <그 섬에 가고 싶다> 오디션을 보러갔어요. 감독은 못 만나고 조감독이 사진을 찍으라기에 실망을 해서 도로 나가다 당시 이창동 조감독과 마주쳤어요. 은행에 돈 찾으러 간다고 둘러댔다고 하대요. (웃음) 결국 1994년 <태백산맥>의 외서댁 역으로 데뷔했는데 원래 2부작의 구성이 바뀌면서 빨치산이 되기로 했던 외서댁이 갑자기 약먹고 자살을 한 거예요. (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매니저 없이 활동하시죠? =연극은 돈 이야기 하고 들어간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전세가 월세 되고 침대 팔고 세탁기 팔고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았죠.

-저녁에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뭘 처분하나 고민하는 생활이었네요. (웃음) 1996년 박철수 감독의 <301·302>로 많은 상을 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작품으로 인해 스크린 연기에 대해 심각하게 혼란에 빠졌다고 쓰셨던데요. =<태백산맥>은 풀숏, 롱숏이 많아 연극 연기하듯 해냈는데, <301·302>는 클로즈업도 많고 움직임이 크다거나 포커스를 벗어났다는 지적을 들으며 정신이 없이 찍었어요. 영화 메커니즘에 관심이 생겼죠. 왜? 내 연기에 영향을 끼치니까! 편집실과 믹싱실도 기웃거리며 미세한 음향을 잡아낸다든가, 언제 쓸까 싶던 숏이 붙어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걸 보며 신기했어요.

-결국 연출에 대한 욕구의 출발은 영화 연기를 더 잘하겠다는 의욕에서 출발한 셈이군요. 기술적인 질문이 있으면 스탭들에게 바로 묻는다면서요? 올해 정동진영화제를 방문했을 때도 현지에서 만난 원신연 감독을 다짜고짜 붙들고 궁금증 해결부터 하셨다고 들었어요. =전 모르면 모른다고 해요. 가장 어려운 분야가 특수효과와 특수분장, 스턴트예요. 머리로 생각한 대로 결코 되지 않거든요. <오로라 공주>에서는 피 뿌리는 장면에서 난리를 쳤고 단편 <날아라 뻥튀기>에서는 공중에 부서져 날리는 뻥튀기 가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CG로 그렸죠.

-김기덕 감독의 <파란대문> 연출부로 일할 것을 고려했고 이후 <수취인불명>에서 양동근씨 어머니 역으로 출연하셨습니다. 김기덕 영화에 대한 관심도 감독지망생으로 제작 방식을 견학하고 싶은 동기가 있었던 것인가요? =원래 <섬>에 캐스팅 논의가 되어 감독과 만났고 <수취인불명>은 그와 대조적인 역할이기 때문에 같이 하기로 한 거였죠. 그런데 감독님이 갑자기 서정씨한테 꽂힌 거예요. (웃음) 감독에게 물었더니 마음이 가는 비율이 49 대 51도 아니고 50 대 50이래요. 큰돈 들어가는 영화도 아닌데 감독이 원하는 걸 해야지 그랬어요. <수취인불명>의 창국 엄마는 제게 맞는 역할이 아니었어요. 연배 때문이라기보다 솔직히 치열한 모정이든 가혹한 모정이든 제가 받지도 베풀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죠. 완성된 영화를 보니 <섬>은 서정에게 더 맞는 작품이더군요.

-반려견을 평소에 동행하실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는 걸로 압니다. 공교롭게도 배우로서 대표작에 드는 <301·302>나 <수취인불명>이 개를 죽이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어요. (웃음) 인육을 먹는 설정도 나오지만요. =<수취인불명>에 참여하면서 김기덕 감독에게 해외영화제를 지향한다면 강간이나 동물학대는 금기 중 하나고 무엇보다 내가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드니 표현을 완화해달라고 했어요.

-배우 입장에서 김기덕 감독님 현장은 마냥 행복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빨리 찍는 것은 좋은데 사전준비를 할 틈이 없다보니 본능적 연기밖에 못해요. 인물에 대해 심사숙고할 겨를이 없죠. 불붙은 짚단을 감독이 제쪽으로 차서 머리가 타는 바람에 세 시간 걸려 솎아내기도 했어요. (웃음)

-현장을 오래 경험한 배우로서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 했던 감독의 행동방식이 있나요? =감독의 어떤 행동이 전체에 폭력이 될 수 있구나 마음에 새긴 부분은 있죠. 뭘 찍어야 할지 모른다거나, 컷을 해놓고도 오케이인지 아닌지 판단을 못한다거나, 다시 찍는 이유를 명확히 이야기해주지 않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영화가 궁극적으로 감독의 작품으로 남는다 해도 나머지 사람이 소모품이 되어선 안되죠.

-대중이 보기에는 <오로라 공주>가 감독 방은진의 기점이지만 들여다보면 김진한 감독 <장롱>의 연출부로 일한 경험이 터닝포인트인 셈입니다. =<장롱>의 연출부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스탭이 제 기질에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영화를 찍으며 막노동하고 교통 통제하는 작업이 카메라 앞에서 끝없는 자의식, 익명의 시선과 싸움하는 배우의 일에 비해 너무나 홀가분했어요. <301·302> 찍을 때 세트에서 라면 끓여먹으며 밤샘하는 막내 스탭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영화에 대한 사고와 열정이 배우인 나보다 훨씬 크고 깊었어요. 전 아마 그들을 동경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연출을 공부했지만 막상 작업을 하고나니 막연히 나도 단편을 찍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요.

-시간과 예산 낭비에 대해 제작자만큼 민감한 감독이라고 하던데요. =경험한 현장이 박철수, 임권택 감독님 현장이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학생들한테도 너희 HD 촬영이라 필름 안 들어간다고 20, 30테이크씩 가는 건 뭐냐, 회차 조절 안 하면서 무슨 저예산영화를 찍냐고 잔소리해요. 필름은 안 쓸지 몰라도 스탭들이 뼈빠지는 거거든요. 기점은 아비드 편집의 도입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현장편집이 필요한 장면도 있지만, 편집은 엄연히 재창조고 편집기사는 영화를 객관화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현장에서 연출자가 편집해 그대로 해달라는 영화치고 잘된 영화 없다고 학생들한테 말해요. 요즘 영화문법이 그런지는 몰라도 전 앞으로도 그렇게는 영화 안 찍을 거예요. 현장편집 보라고 PD가 부르면 부팅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요. (웃음)

이창동 감독은 제일 무서워하는 분 중 하나

-배우로서 낭비된 영화들이 꽤 있어요. 작품 운이 좋다고 말하긴 어렵죠. =사실 도와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해 출연한 작품들도 있어요. <해피엔드>도 캐스팅 이야기가 오가다가 명필름으로 제작사가 옮겨가면서 전도연씨가 하게 됐는데 정지우 감독이 미안하다고 하기에 “충분히 상업적인 배우가 못 되어 내가 미안하다”고 했어요. 저는 우리 연출부에게도 오디션을 보고 떨어진 배우에겐 불합격이라고 꼭 연락해서 무작정 기다리지 않게 하라고 해요. 빨리 다른 일 잡아야 하니까요. 캐스팅할 때도 오르지 못할 나무인 배우를 연출부가 넘보면 “너라면 하겠니? 나라도 안 하겠다” 그래요. 배우 입장에서 생각이 되는 거죠. 하하.

-2002년 <비디오를 보는 남자>의 시사회 무대 인사에서 “배우로서 마지막 작품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연출과 연기를 겸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나요? =<비디오를 보는 남자>도 캐스팅 디렉터를 해주다가 출연한 케이스예요. 일단 연출에만 몰두해 일정한 시기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아는 영화인 한분도 객관적으로 연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작품의 신뢰도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연기하고픈 마음도 없었어요. 솔직히 연출이 훨씬 재밌어요. 일단 분장 필요없고 옷 안 갈아입고 무조건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웃음) 연기는 제 능력에 비해 과포장된 면도 있고 배우 인생을 대표할 만한 제대로 된 역을 뚜렷이 보여주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안달이 나지도 않고요.

-TV 연기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중 <우묵배미의 사랑>을 원안으로 삼은 드라마 <바보같은 사랑>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봉제공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역 연기가 기억납니다. =<바보같은 사랑>은 이렇게만 한다면 TV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을 만큼 감독도 촬영감독도 팀워크도 좋았어요. 데면데면한 대사를 못한다고 지적받았는데 노희경 작가에게 많이 배웠죠.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5년여를 이스트필름에서 보냈습니다. 명계남 대표는 제작자로서 끝까지 자기를 믿어주고 남아준 감독은 방은진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연출을 해보라고 처음 권유한 분이 명 대표님이셨고, <오로라 공주> 준비과정에서 감독 교체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저를 보호해주신 것도 명계남 대표였어요. 명 대표님은 작품에는 그리 관여하지 않았어요. 영화가 지연되니 오히려 이창동 감독님이 시나리오 갖고 와보라고 했죠. “이 시나리오 갖고 데뷔하려고 해요? 제작부가 기다려서? 연출부가 꾸려져서? 다 가라고 하세요. 처음부터 다시 쓰세요” 하시는데 마음이 아파서 울면서 자유로를 달린 날도 있었어요. 5년 준비만으로도 내 30대 중반을 다 날린 건데, 당신은 마흔셋에 데뷔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분 중 한분이세요. 정곡만 찌르시니까. 현장에 오셔서도 시간 내 다 찍었다고 좋아하는 제게 누구나 하는 평균치를 하면서 만족하지 말라셨어요. (웃음)

-구체적으로 주로 조언을 얻은 부분은요? =관객 입장에서 의견을 주셨어요. “관객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아세요? 관객은 느끼지도 못하는데 자기들끼리 사랑했다고 하는 거,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또 설명하는 거예요”라고. 스타일 면에서 저의 로망은 이명세 감독님이고, 정서에 있어서는 김태용 감독님이에요. 김태용 감독이 인간관계에 들이대는 시선을 보면 좋으면서도 난 저렇게 못 찍겠지 해요.

-첫 단편 연출작 <파출부, 아니다>는 가사 도우미의 하루를 그렸습니다. <날아간 뻥튀기>는 정체된 도로변에 아기를 위태롭게 놓아두고 뻥튀기를 파는 독신모 이야기고요. <오로라 공주>에는 밥집 아주머니가 부유한 여인에게 모욕받는 장면이 있죠. 연출작을 보면 남녀간의 모순보다 계급이나 지위가 다른 여자끼리의 권력 관계에 매우 민감하다는 인상입니다. =왜 그럴까? 저도 궁금해요. 여자로서 내가 기득권자라고 생각해서 그런 현상에 시선이 더 가는지도 몰라요. 살면서 여자란 이유로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해도 내가 우연히 여성으로 태어나 여자 역을 하고 남성으로 태어나면 남자 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젠더의 계급성에는 관심이 없어요. 단편에서는 상업화되기 힘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반면 상업영화를 염두에 두고 구상하는 토픽은 전혀 또 달라요.

-<오로라 공주>는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나 영화 만드는 어엿한 선수예요”라고 공표하는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장편 하나를 만들며 일정한 시간과의 싸움은 분명히 했지만 감독이 한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감독은 좋은 스탭을 꾸리고 그들이 최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아니 차선들을 조율해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능력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좀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스탭과 배우들이 저보다 훨씬 고민하고 있음을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게 중요해요. 감독이 되면서 시나리오를 제일 많이 읽는 사람이 감독이 아님을 알게 됐어요. 감독은 콘티 이후로는 시나리오를 보지 않지만 최영환 촬영감독은 별것도 아닌 시나리오를 끝까지 쥐고 있었어요.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연기 디렉션이 이해돼도 표현이 빨리 안될 수 있거든요. 그때는 “죄송합니다. 제 연출이 틀린 것 같아요. 원래대로 하세요”라고 말해요. 그러면 다음 테이크에는 자기 소신대로 한다고 하면서도 이미 내 요구가 포함돼 있어요.

<오로라공주>는 호흡조절을 못했어요

-한국 연기자들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기술적 심리적 문제라면 뭐가 있을까요? =연기는 궁극적으로 스크린을 보는 관객에게 통해야 하는 것인데도 현장의 카메라 앞에서, 연출자에게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나 싶어요. 놀랍게도 가끔은 정말 관객과 소통을 하는 배우가 있죠. 송강호 귀신이라든가, 조승우 귀신이라든가. (웃음) 전도연씨, 김혜수씨도 그런 작품이 있고요.

-말씀하신 경향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끈끈하고 동료의 평가가 중요한 한국의 특성 때문일까요? =글쎄요. 우리 영화 현장이 사람 대 사람으로 뭉쳐 있어 배우의 인간성까지 많이 왈가왈부하고 편가르고 신경쓰게 하는 풍토도 관계가 있을 거예요. 배우들이 말로는 나도 관객의 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관객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는 숙련되지 않은 면이 있죠.

-배우 출신 감독이라 투자나 진행에 보탬이 되는 것은 없겠죠. 반면 감독으로서 성취 여부가 다른 감독보다 덜 절박할 거라는 시선이 은연중에 있을 법합니다. 여차하면 연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억울한 적은 없었나요? =한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을 못해봤네요. 아마도 그런 시선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겠죠?

-감독이 된 뒤 배우 시절과 비교해 사람들의 태도에서 느끼는 차이가 혹시 있나요? =감독과 배우는 보완적 관계인데도 젊은 배우들에게 감독은 절대적인 존재에 가깝다는 걸 느꼈어요. 일상에서는 어떤 부탁을 거절하기가 쉬워졌어요. “바쁘시겠지만”이라는 말이 부탁 앞에 붙더라고요. 배우는 안 보이면 쉬는 거지만, 감독은 보이지 않아도 뭔가 하고 있으리라 짐작하나봐요. (웃음)

-감독으로서 우선 보강할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오로라 공주>는 호흡조절을 못했어요. 신인이다보니 들었다 놓았다 하면 리듬을 놓칠까봐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뛴 거지.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것은 대상을 어떻게 한 프레임 안에 영화적 모양새로 담아낼 수 있을까예요. 지금까지는 인물의 행동과 관계없이 사물이나 신체 일부를 잡는 인서트 컷이 멋부리기라고만 생각해서 부러 정공법으로만 갔어요. 그런데 이젠 그 숏들이 주는 정서적 감흥을 알았어요. 관객 입장을 생각한다면서도 소비 주체로만 생각한 거죠. 요즘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같은 사물도 다르게 잡는 연습을 해요. 육안이 아닌 파인더로 보았을 때 의미가 탈착되거나 강화되는 걸 느끼죠. 수업을 할 때도 바스트 숏은 배우의 책임이라는 말에서 그치지 않고 바스트 숏과 감정적으로 등가인 물컵의 인서트 숏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외로움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세요? =외로움하고 잘 놀지요. 나이 들면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평범하게 살아야지 했는데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되긴 해요.

-평범을 과소평가하셨네요. (웃음) 혼자 오랜 시간 살아가다보면 자기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더 뚜렷이 느끼지 않습니까? =그 점은 타고났어요. 어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내 안에 너무 많은 속성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새해에는 드라마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일찍 독립해서 스스로를 지금껏 부양해 오셨습니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다가 훈련도 받지 않고 연극계로 무작정 뛰어들었고 연출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연출부에 들어가 바닥부터 배워나갔습니다. 고독이 도리어 힘이 되는 건가요? =돌아보면 성장과정이 무척 외로웠는데 그때는 외로운 줄 몰랐죠. 그런데 한곳에서 부족하면 다른 데서 채워지는 법인지 일하면서 얻은 인복이 컸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단독호주로 호적을 분가했어요. 그걸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인데(웃음) 실은 누군가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고 보호자라는 존재를 가져봤으면 하는 바람도 어려서부터 깊은 갈증이에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뭘 원하는지는 분명히 아는 편이에요.

-배우만 했다면 이미 원숙한 나이이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했을 텐데요. 연출자로 데뷔해 앞으로 배울 것, 만들 것이 많은 상태가 되니 상대적으로 나이의 무게감이 부쩍 덜하지 않나요? =철이 없는 거죠. 솔직히 나이를 별로 인식 못해요. 배우 일만 했다면 언제 처음 아이 엄마 역할을 하느냐에 민감했겠죠. 주연에서 조연으로 넘어가는 문턱도 그렇고요. 하지만 나는 스크린에 데뷔하고 이름을 알렸을 때는 이미 30대에 접어들고 있었고 주연을 하면서도 조연을 해서인지 분류가 마음속에 흐릿해요. 그래도 <미쓰 홍당무>에서는 극중 나이 마흔다섯을 마흔셋으로 해주면 안되냐고 하긴 했지만요. (웃음)

-두 번째 장편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요? =영화사 비단길과 한편을 계약한 상황이에요. 내년일지 내후년일지 모르겠네요.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조금 늦어지면서 다른 이야기를 준비할지도 모르고요. 새해에는 돈 버는 일도 좀 할 것 같아요. 드라마도 들어와 있고 뮤지컬도 하게 될 거예요.

-영화로 어떤 경지를 추구하기보다 영화를 만들며 살아가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슬럼프에 빠져 있다가 단편 <날아간 뻥튀기>를 만들면서 ‘내가 영화 만들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영화가 날 살리는구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영화는 사실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걸 요구하기도 해요. 인생의 한 시기를 통틀은 시간과 엄청난 열정, 경제적 담보 등등. 그에 비하면 허무한 결과도 얼마나 많아요! 영화는 정말로 이기적이에요. 이렇게 말하다보니 제가 영화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대로 보는 거 같네요. (웃음)

追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방은진의 집을 찾았다. 유달리 사색적인 눈매로 인해 ‘달라이 라마’라는 엄숙한 이름을 얻은 여덟 살배기 골든리트리버가 주인과 함께 현관에 마중을 나왔다. 지난 여름 정동진 영화제를 찾아가 당당히 바다 수영까지 즐긴 라마는 당시 <씨네21> 기사에도 등장한 경력이 있다. 거실 입구 테이블 위에 12월30일 무대에 오르는 <지하철 1호선> 4000회 기념 공연대본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가 길어지자 라마는 발톱을 또각또각 깨물었다. 초조할 때 손톱을 뜯는 방은진의 버릇이 옮은 것이라 했다. 집안 곳곳의 화분이 시들해서 눈길을 던졌더니, 아픈 동물은 잘 돌보는데 웬일인지 식물 농사는 젬병이라고 방은진이 갸웃거렸다. 아마, 그녀의 손에 열이 많아서일 것이다. 뜨거운 그녀는 지금 6년째 연애중이다. 어릴 적 부모님과의 관계에 이어 인간에 대한 신뢰에 두 번째 변화를 일으킨 상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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