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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독설] 개봉지원 예스! 제작지원 노!

문화의 다양성 살리기 위해 영진위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개봉영화 지원제도를 없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가 나왔다. 나 역시 그 비판에 동의한다. 영진위가 개봉영화 지원제도를 없앤 것은 심각한 오판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보자. 영진위는 대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일까? 명칭 그대로 국내의 영화산업과 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한 조직일 것이다. 영화산업과 문화에서 개인이나 사기업이 하기 힘든 일을, 국가가 대신해서 해주거나 지원해주는 것. 그렇다면 영화산업과 문화의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단 기업이 해야 하는 일을 빼고.

그렇다면 개봉 지원이란 대체 무엇일까? 개봉 지원을 하는 경우는 대개 저예산영화다. 저예산영화는 만들기도 힘들지만 배급은 더욱 힘들다. 배급 시스템이 상업영화 중심으로 짜여 있기 때문에 배급과 마케팅 비용이 상당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의 경우에도 계속해서 개봉이 밀리거나 아예 관객과 만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영진위는 개봉 지원제도가 없어진 대신 다양한 제작 지원이나 시네마테크 지원 등을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뭐, 그 말도 맞긴 맞을 거다. 당장 개봉 지원이 없어진다고 한국영화가 망하는 건 아니니까.

상업영화 제작지원 성공한 적 있었나

그런데 저예산영화의 제작을 지원하는 것과 이미 제작된 저예산영화의 개봉을 지원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 닭과 달걀 중에서 무엇이 먼저냐, 는 질문과 비슷하지만 나는 개봉 지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창작자의 사적인 욕망이 우선하지만 배급과 흥행에는 산업적인 시스템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다.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데 굳이 제작 지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예술영화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고, 사실 상업영화와의 기준도 애매하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업적이든 예술적이든 각자의 목적을 가진 개인이나 사기업이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일단 영화가 만들어진 뒤 그 영화가 비록 소수에게라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면 어떻게든 관객에게 보여지도록 만드는 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지도록 지원을 하는 것은 단순히 한편의 영화에 특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좋은 영화,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대중에게 더 많이 제공된다면, 그것은 미래에 더 많은 관객이 예술영화를 찾는 기반이 된다. 즉 한국의 영화판이 대규모 상업영화에만 휘둘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래전 이광모 감독에게 걸작 예술영화를 수입, 개봉한 백두대간 영화사를 만든 이유를 들었다. 해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예술영화들을 왜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자신이 미국에서 예술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 것처럼 국내에서도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자. 예술영화가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많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낯선 것이다. 백두대간 덕분에 한국의 관객은 책이나 잡지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영화들을 직접 스크린으로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90년대 후반 예술영화가 반짝했던 것에는 백두대간의 힘이 컸다.

좋은 영화를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지도록 지원하는 것은 적극 찬성이지만, 직접적인 영화 제작 지원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동안 영진위에서 해왔던 영화 제작 지원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거창했다. 게다가 상업영화에 대한 제작 지원이 성공한 경우도 거의 없다. 지원을 받은 많은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하거나 아예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시나리오 개발 지원도 마찬가지다. 10편을 지원하면 1, 2편이 겨우 만들어졌고 예외없이 실패했다. 그렇다면 대체 영진위에서 왜 상업영화를 지원하는 것일까?

물론 이유는 있다. 이를테면 영진위가 시나리오 개발 지원을 한 이유는 국내에서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년 전 모 영화사에서 잠시 기획 PD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경험도 미천한 신참 PD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 개발을 하는 과정이었다. 일단 아이템을 찾아내고, 시놉시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작가와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단계에서는 작가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시놉이 다 완성되고 위에서 검토가 끝난 뒤, 시나리오 계약을 해야만 돈이 나온다. 작가에게 시놉을 잘 써서 계약을 하자고 말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하고, 보기에 괜찮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해도 위에서 거부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가는 시간은 시간대로 뺏기고 헛수고를 한 셈이 된다. 내 능력이 없는 것에 한탄도 했지만, 작가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한국의 영화사는 아이디어와 시놉시스에는 개발 비용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 상업영화의 아이디어가 거기서 거기인 이유는 영화사가 아이디어 개발에 소홀하기 때문이 아닐까?

3·4기 사업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필요

영진위가 시나리오 개발 지원을 한 것은, 영화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개발 지원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그게 영진위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에는 절실함이 필요하다. 할리우드가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수익을 올리겠다는 절대적인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 영화사도 수익을 올리겠다는 목적은 같지만 거기에 눈먼 돈이 들어가면 크게 절박해지지 않는다. 다음에도 그렇게 어딘가의 지원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혹은 영화가 망해도 상환을 할 필요가 없는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괜찮은 시나리오 하나 건져서, 능력있는 감독을 붙이면 여기저기서 투자가 들어오고 지원도 받을 수 있으니 영화 만들기에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물론 독립영화나 실험영화 등에 대한 지원은 항상 필요하다. 상업성이 거의 없지만, 전반적인 영화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영화들이 나오도록 지원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실험영화들은 영진위에서 제작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공공의 이익이 되는 영화의 제작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그 기준이 더욱 엄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고,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좋은 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나도록 다양한 개봉 지원을 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마케팅 비용을 지원해주든, 전용 극장을 더 많이 만들고 지원을 하든, 케이블이나 VOD로 볼 방법을 더 많이 만들어주든, 그것이 다양한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이번 개봉영화 지원제도 폐지를 둘러싼 비판을 보면서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건 <씨네21>을 비롯한 영화계 주변 언론의 태도였다. <씨네21>이 지나치게 편들기를 하지는 않는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현재의 5기 영진위는 꽤 문제가 많고, 특히 위원장의 과한 언행 등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한없이 가볍다. 대부분의 논조가, 지금까지 잘해온 것을 왜 바꾸려고 하는가,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善)으로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은 독선적인 태도다.

정말 필요한 것은 지난 3, 4기 영진위가 펼친 사업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다. 철저하게 공과를 따지고, 그런 분석을 통해서 5기가 어떤 사업을 펼쳐야 하는지를 제시해야만 했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과거를 비판하고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영진위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다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영진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영진위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철저한 분석과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씨네21>이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야말로 영진위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