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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찾아낸 풍경] 빈집을 달콤하게 바꿔라

재개발 앞둔 주택을 한달간 리뉴얼해서 만든 영화 <키친> 속 모래와 상인네 집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면 안되는 건가요?”

영화 <키친>의 모래(손민아)는 남편 상인(김태우)과 프랑스에서 날아온 요리신동 두레(주지훈)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영화는 이들에게 벌어지는 봄날의 햇살 같은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아니 햇살 때문에 생긴 사랑의 에피소드다. 영화 <키친>에 대한 관객의 반응 또한 봄햇살처럼 짧고 간결했다. 범람하는 외화도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경제한파 속에서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홍지영 감독의 영화 <키친>은 로케이션의 매력이 숨어 있는 작품이다. 다시 들춰내보자.

잔디 깔고, 창틀 붙이고, 화장실을 예쁘게

영화의 장소는 등장인물의 의상과도 같다. 아름다운 이브닝드레스 같이 화려한 장소는 영화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고 인물의 현재상태가 행복하거나 즐거운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피묻은 작업복처럼 어둡고 음침한 곳은 위험하고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키친>은 이러한 흑백 구분의 중간쯤에 있는 일상적인 장소들을 채워넣은 영화다. 로케이션의 범주에서는 한정된 선택을 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러한 선택이 집에서 ‘편한 잠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눈에 거슬리지 않는 편안함을 준다.

모래와 상인의 집, 그리고 요리를 연구하는 작업실, 모래의 양산가게, 상인 친구의 사진스튜디오, 그리고 야구장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곳이다. 공간의 크기와 설정이 세트메뉴인 양 잘 맞아 있다. 조용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이야기만큼이나 그 장소들도 소박하게 보인다. 특히 영화의 8할 정도를 소화하는 상인과 모래의 집은 이들 부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부에게도 ‘나도 저런 집에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널찍한 잔디 마당은 큰 나무들과 함께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든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볕 좋은 마당에 있는 평상은 방금 전까지 아내의 무릎을 베고 막 달콤한 낮잠을 잤을 것같이 사람의 온기를 오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벽돌로 만들어진 단층 주택이지만 그리 크게 보이진 않는다. 흔히 드라마에서 보는 회장댁이나 부모 잘 만난 젊은 ‘낑깡부부’의 집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저 젊은 부부의 아담한 개인 주택인데, 현실에서는 이마저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상인이 ‘잘나가던 증권맨’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키친>의 김재희 제작실장은 영화를 위해 집의 많은 부분을 리뉴얼했다고 말했다. 뉴타운 공사를 위해 SH공사가 매입한 빈 주택을 빌려, 영화 촬영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1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잔디를 다시 깔고 창틀을 붙이고 주방의 창문을 넓히고, 방문을 다시 붙이고, 화장실을 예쁘게 세팅했단다. 보통 집을 촬영할 때는 외부 장면은 오픈 로케이션에서 촬영을 하고 내부 장면은 세트에서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술적인 아트워크를 갖춘 집을 찾기도 힘들지만 현지인이 사는 집일 경우 모든 살림살이를 걷어내고 다시 만들려고 하면 마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홍지영 감독은 처음부터 세트를 염두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숨겨진 주방을 일상의 공간으로 오픈

아마도 감독은 우중충하고 닫혀 있는 주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다 보면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은 남들에게 주방을 숨기고 있다. 주방기구들은 최고급 독일제를 쓰면서도 창문은 교도소의 그것보다 작고 납작하다. ‘주부’ 아니 ‘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주택 건축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택에서 치부처럼 숨겨진 주방(자꾸 주방이라고 하니까 ‘kitchen’보다는 덜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다)이라는 공간을 감독 스스로가 감독이기에 앞서 ‘여성’의 시점에서 애정을 가진 듯 보인다. 주방은 어떤 곳인가. 밥을 하는 곳을 넘어서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맛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영화 <식객>의 연구실과 수련실 같은 공간의 주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키친>의 주방은 밥을 차리기보다는 요리를 하는 곳이며, 또 다른 사랑으로 어색해져가는 모래, 상인, 두레가 ‘어쩔 수 없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색해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감독은 ‘바람 피우는 예쁜 유부녀’ 신민아를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두레가 너무 잘생겨서일까? 두레 또한 밉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내가 만약 상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여럿 상(喪)당했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인 채로 수개월이 훌쩍 흘러가버리고, 해변가에서 조촐하게 치러지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모래와 상인은 재회한다. 이때 모래와 상인이 앉은 해변가의 바위가 나에겐 그들의 집에 있었던 ‘평상’처럼 보였다. 과거의 그들은 그 평상에서 사랑을 속삭였겠지만, 이제 이혼한 그들은 평상을 나누지 못했을 테니까. 상인이 다시 모래에게 청혼을 한 이 바위는 외형상으로는 그들의 평상과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조금 더 로맨틱한 공간이다. 젊은 시절의 초보부부와 인생 자체가 초보인 ‘훈남’의 솔직담백한 사랑이야기를 특유의 ‘절제된 시선’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찾은 장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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