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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플레저] 아나운서 맞냐고요?
2009-07-31

허일후의 ’막말 하기’

<과속스캔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그렇다. 나는 썩 그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이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길티 플레저라…. 그래도 나름 아나운서인데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주제인가. 부랴부랴 앞서 이 칼럼을 쓴 다른 분들의 글을 찾아 읽어보고는 완전 좌절 모드에 빠졌다(제길슨, 다들 너무 글발이 좋잖아!). 결국 고민만 하다 약속한 날 아침,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다(털썩).

매년 공채 시험마다 2천명이 넘게 지원자가 몰린다는 아나운서는 인기(?) 직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늘 올바른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로 인한 언어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술자리에서조차 정확한 발음으로 욕을 해야 한다는 씁쓸한 농담을 할 정도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늘 과잉교정인간은 되지 말자며 서로에게 다짐을 해보지만, 노래를 들으며 차를 타고 가다가도 매시 정각이 되면 라디오 뉴스 채널로 주파수를 돌리는 현실은 뭐 거의 직업병 수준이다(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참조).

그중 작은 희열을 느끼는 짧은 순간이 있으니, 바로 라디오를 진행하는 순간이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하이파이브, 허일후입니다>라는 올드 팝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는데,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맘대로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는 즐거운 시간이다. 아나운서처럼 진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담당 PD 선배의 비호 아래 가끔 “저 녀석이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지?” 싶을 정도의 막말을 쏟아내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겨울에 만난 여자친구가 자꾸 외투를 입고 오지 않은 채 자신의 외투를 달라고 한다는 한 남자 청취자의 고민 아닌 고민 사연. 아니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엄연한 염장질이다. 이런 경우 DJ의 코멘트는 최대한 깔끔하게. “그럼 가을까지만 사귀세요”(아! 속이 다 시원하다). 그룹 Earth, wind & fire의 노래를 소개할 때는 “이 그룹은 말이죠. 땅, 불, 바람, 물, 마음. 그렇습니다. 캡틴 플래닛이죠~, 캡틴 플래닛이 부릅니다. <판타지>(Fantasy). 점이 많으면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한 다음 선곡은? 모두 짐작하셨으리라. 브라운 아이즈의 <점점>을 틀어주는 센스. 당신의 아침을 깨우는 모닝송으로는 과감히 김혜연의 <참아주세요> 정도는 틀어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미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비유하자면 아침 5시 음악 FM에서 일명 ‘뱀이다~ 송’이 거나하게 나오는 상황이라고 보면 되겠다).

회사 홍보심의국에서 작성하는 모니터링을 받아보면 “간혹 지나치게 가벼운(?) 진행자의 멘트가 아나운서로서 부적절하다”는 냉정한 코멘트가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어쩌랴, 적어도 라디오 스튜디오에 앉는 순간만큼은 아나운서가 아닌 한명의 친구이고 싶은 것을.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기에 저러나 싶은 분들은 매일 아침 5시, MBC FM 4U에 주파수를 맞춰보시길. 그리고 아니 뭐 저 정도가 길티 플레저야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또한 어쩌랴. 아나운서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바를 정(正)자만 열심히 쓰고 살아야 하는 갑갑한 삶의 연속인 것을.

허일후 2006년 천신만고 끝에 전년도 1차에서 떨어뜨린 MBC에 입사. 요트·역도·태권도·복싱 등 온갖 스포츠 중계를 하면서, <하이파이브, 허일후입니다> 진행 중. 직접 선물 당겨오고, 로고송 부르며 열심히 청취자의 아침을 깨우는 중.

허일후/ MBC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