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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져] 나 한국인인데… 몰랐지?
2009-08-14

김상훈의 ‘외국어로 댓글 달기’

<데스노트>

길티 플레저? 원고 마감 따위로 장시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약간의 이인증(離人症) 증세가 발현해서 주변 사람들이나 외부 환경이 마치 영화처럼 약간의 비현실성을 띠기 시작하고, 머릿속이 상대적으로 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안락의자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좋아진다기보다는 태도가 훨씬 더 전투적으로 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감이 어디로 가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웹브라우저를 켜게 되지만, 평소 때와는 패턴이 다르다.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소설 중에 낮에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특수 체질을 가진 흡혈귀 얘기를 다룬 작품이 있다. 밤이면 무덤에서 자야 하는 흡혈귀들은 이 친구의 밥이나 다름없으며, 벨라 루고시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멍청한 동료들이 밥줄인 ‘생태계’를 교란하는 일이 없도록 ‘물관리’를 한다는 내용이다. 인간사회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생태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21세기 초 한국에서 가장 손쉽게 액세스할 수 있는 생태계는 인터넷이 아니던가(약간의 이인증 증세는 당연히 약간의 망상 증세를 수반한다).

초창기에는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었던 인터넷도 21세기 들어서는 양극화, 계급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윤리적으로 가장 저열하고 지능이 낮은 치들의 서식지를 찾아내는 일은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다. 실생활에서야 정치 뉴스 따위를 보면 얼마든지 널려 있지만, 누가 말했듯이 네트는 광대하므로 쥐나 바퀴벌레 따위의 해충이 숨을 장소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은 곧잘 들르는 곳, 이를테면 세계 최대의 익명 게시판으로 알려져 있는 2채널(2ちゃんねる)이라든지 이런저런 영문 메타 블로그를 검색해서 그들의 언어로 댓글을 단다.

최근 들어서는 소시오패스라든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의 글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글에서 배어나는 소시민적 옹졸함이라든지 아둔함, 무지 따위를 지적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이른바 악플을 달거나 F-word를 쓰는 일도 거의 없다. 참된 악플이란 치졸한 욕설로 점철된 글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성의 기회를 줌으로써 그때까지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잃어버린 염치를 되찾게 해주는 일종의 정화(淨化) 촉매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그 과정에서 화가 났다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예의 정화작용의 대가로 여겨 주시기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슴에 와 닿는 ‘그들’만의 언어를 써야 한다는 점이다. 문법을 틀린다든지 상대방과는 계급이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다는 인상을 조금이라도 준다면 익명성은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다시 길티 플레저 얘기로 돌아와서, 자기들이 ‘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악플러들에게 일종의 안티-악플을 달면서 남에게 말하기 뭐한 쾌감을 느낀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로 켕기고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런 과정에서 외국어 쓰기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이다. -_-

김상훈 SF 평론가 겸 번역가. 술 안 먹는 작가 테드 창이 올해 PiFan에 온 덕분에 체중이 5kg이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