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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의 블랙박스] 아는 영화, 낯선 감상
정한석 2009-08-27

<충녀>

지난 일요일 EBS <한국영화특선>에서 방영한 김기영의 <충녀>를 보며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두편의 한국영화를 떠올렸다. 소실이 되기를 스스로 청하여 기어이 집안에 들어온 무서운 그녀(윤여정)와 마땅치 않은 그녀를 인정한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비상식적인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바로 그때였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기영의 팬이다. 그들이 <마더>와 <박쥐>에서 어떻게 김기영의 영향을 영접했는지는 사실 확실치 않고, 있다 해도 그들의 영화를 말할 때 주변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사소한 지면에서는 거론할 만한 것 같다. <마더>에서 도준(원빈)이 문아정을 죽인 뒤 시체를 끌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그 장면에서 나는 문득 김기영 영화의 계단을 봉준호의 인물이 오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는 도준과 엄마 혜자가 사는 집을 투명하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곳으로 설정한 뒤 그 바깥에 놓인 카메라로 인물들(김혜자와 진구가 나오는 음산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을 으스스하게 응시할 때 여기 김기영의 영화가 연관됐다고 강하게 느낀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는 마작을 벌이는 군상의 식탁이 그런 인상을 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테레즈 라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우스꽝스럽게 희화화된 인물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들이 빙 둘러앉아 마치 자기 차례가 오면 당연하다는 듯 한마디씩 헛소리를 할 때 그건 <충녀>의 식탁을 둘러싼 그 식구들의 그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분열적이고 기괴한 대화들.

그런 경우들이 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다시 돌아오는 장면들. 혹은 보는 이가 그렇다고 추론하고 싶어지는 장면들. 한편의 영화 안에서 다른 영화의 기운을 보는 건 불투명하거나 비약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계단과 창문의 안과 밖과 탁자의 인물들을 놓고, 희화화와 비극적 정조 사이를 음유하는 김기영의 유령을 두 후대 감독이 영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엉뚱하게 물어놓고 이렇게 자문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 엉뚱함이 정말 엉뚱한 걸까라고. ‘상상의 계보’는 일부러 축조하지 않아도 엉뚱한 곳에서 스스로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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