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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16] 명예이자 멍에였소, 할렐루야!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08-28

매너리즘과 관객의 피로감을 동시에 경험했던 <할렐루야> <인연> 촬영 에피소드

<할렐루야>

<아메리칸 드래곤>을 끝내고 귀국한 게 1996년 12월, 또 하나 밀려 있던 영화가 바로 <현상수배>였다. 내가 대마초 사건으로 여러 소송에 휘말려 돈을 물어주고 하는 가운데 워낙 돈이 절실했던 때라 구치소에서 계약했던 작품이다. 그래도 <현상수배>는 시작부터 내가 거의 기획자로 참여한 영화나 다름없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떠올렸던 아이템인데,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 제이(박중훈)가 미국 암흑가 내 중국 조직의 보스인 써니(박중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소동극이 핵심이었다. 미국 암흑가를 무대로 했으니 언젠가 꼭 내가 주인공으로 나서서 미국에서 찍겠다고 마음먹은 작품이었고, 나와 같은 NYU 출신이자 이후 <B형 남자친구>(2005)를 감독하게 되는 최석원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 내가 염두에 둔 감독은 따로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정흥순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됐다. 정흥순 감독은 이후에 <가문의 영광>(2002)으로 흥행감독 반열에 오를 정도로 재능있는 감독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현상수배>라는 작품과는 좀 안 맞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실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당시 나는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 비자가 당분간 나오지 않는 상태였기에 미국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배경을 호주 시드니로 돌려 촬영한 거다. 그러다보니 원래 기획의도에서 크게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애착이나 기대와 별개로 내 영화 중 애초의 목표와 가장 다르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현상수배>라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한달간 호주 왔다갔다 하며 광고촬영

1996년부터 1997년 초까지 <깡패수업>의 일본, <아메리칸 드래곤>의 할리우드, <현상수배>의 호주 영화현장을 차례로 경험하며 많은 걸 배웠다. 충무로 영화현장이라는 게 ‘정’이라는 최대 강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프로덕션 과정 자체가 합리적이지 못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호주 현장은 직접적으로 할리우드 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었다. 역시 매일 나오는 ‘콜 시트’ 스케줄대로 세달여를 촬영했는데 정말 끝날 때까지 펑크 없이 그대로 찍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스케줄이 즉흥적으로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때도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던 기억이 난다. 10개 가까이 광고모델을 하던 때니 한 제품당 서너 편을 찍어야 하는데 세달 동안 호주에 머무르게 되니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었다. 월∼금요일 내내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촬영이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숙소로 돌아가서는 ‘다이얼로그 코치’와 대사를 연습한다. 그러고서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밤 10시나 11시쯤 되는데 주말은 무조건 쉰다. 그러니 금요일 밤에 일정이 끝나면 분장도 못 지운 채 바로 공항으로 가서 밤 비행기를 타고는 한국으로 떠난다. 토요일 아침에 내려 샤워하고 바로 광고 촬영을 시작해서 일요일 아침까지 쉬지 않고 광고를 찍는다. 그런 다음 다시 샤워 정도만 하고 공항으로 가서 오후 비행기를 타면 월요일 아침 시드니에 도착한다. 4주 정도 그렇게 생활했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배우 생활 가운데 과거를 회상하면 아직도 그때가 가장 과로했던 기억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호주에서의 촬영은 참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은 물론이고 할리우드와 비교해도 다른 의미에서 역시 합리적이면서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현장이었다. 월∼금요일 정해진 스케줄대로 열심히 일하다가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는 정말 즐겁게 논다. 그리고 얘기를 해보면 사람들이 참 무슨 생각을 하며 사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 없더라. 성공에 대한 갈망이나 야망도 없어 보여 처음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속으로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계속 겪다보니 정말 자기 자신에게 아낌없이 투자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위해 모든 걸 저축하고, 가진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게 미덕이라 여기는 보통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게으른 한량이라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들과 같은 생각과 속도로 살아가는 것도 참 매력적이었다. 즐기면서 산다는 것이 일을 허투로 하면서 제멋대로 산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일을 할 때는 정말 완벽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볼 때는 참 재미없이 쳇바퀴 돌 듯 갑갑하게 산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저 서로의 기준이 다른 거다. 기대만큼 흥행하진 못했지만 <현상수배> 호주 로케이션은 그렇게 내 삶을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좀더 넓혀줬다.

그 밝은 웃음, 김지호에게 안부 전하고파

<할렐루야>는, <현상수배>를 끝내고 돌아와서 코미디영화에 좀 지친 느낌도 있어서 고민이 되긴 했지만 신승수 감독과의 인연도 있어 이런저런 이유로 하게 된 작품이었다. 생전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 없는 사기꾼이 교통사고를 당한 시골 개척교회 목사를 대신해 시골 교회 개척자금 1억원을 타내기 위해 가짜 목사 행세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 인물을 ‘캐릭터’와 ‘배우’ 두 가지 관점으로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할렐루야>는 캐릭터의 매력이라기보다 배우의 능력으로 밀어붙이는 영화였다. 명확한 캐릭터 구축과 더불어 배우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데, 전자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 자체의 개인기만 부각된다면 소모적인 면이 크다. 그런 점에서 <할렐루야>는 큰 명예이자 멍에다. 나의 개인기로 환호를 받고 영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명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이 급격하게 소모되고 소진됐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는 멍에가 된 거다. <할렐루야>를 끝내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것을 기분 좋게 만끽하지는 못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는 없지만 관객이 나에 대해 아주 빠르게 식상함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했다.

내 필모그래피가 <투캅스2>까지 치고 올라가다가, 그 이미지가 영화는 물론 CF까지 가세해서 융단폭격으로 쏟아지고 그 다음에 <똑바로 살아라> <현상수배> <아메리칸 드래곤>에 이르기까지 좀 지쳐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돌아와서는 <할렐루야>를 끝낸 거였다. 내가 계속해서 소모되는 느낌이었고 뭔가 좀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또 나를 <깜보>(1986)로 데뷔시켜주신 이황림 감독님께서 로맨틱코미디를 한편 하고 싶다며 <인연>이라는 작품을 제의했다. 내 배우 생활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긴 하지만 ‘관객은 지금 나에게 지쳐 있습니다. 조금 일찍 제안을 하시지 그랬어요(사실 나는 감독님께 영화 한 편 하자고 90년대 초반부터 계속 말씀드렸었다), 아니면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감독님께서 하신다면 하겠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요지의 얘기를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그걸 거절할 수 없어서 <인연>을 하게 된 거다. 나는 지금도 이황림 감독님을 매우 훌륭한 감독님이라 생각한다. 그분의 능력만한 대형 히트 영화가 없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아쉽다. 그래서 <꼬리치는 남자>(1995)를 함께했던 김지호와 다시 <인연>으로 만나게 됐다.

김지호는 노처녀 역할이었고 나는 잘나가는 증권회사 직원이자 모든 여자를 다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치는 바람둥이 역할이었다. 그러고 보면 김지호도 나와 두편이나 호흡을 맞춘 배우다. 당시 워낙 씩씩하고 보이시한 매력으로 인기를 끌던 배우라, 실제 전공은 영문학인데 만날 때마다 농담 삼아 ‘너 체육과 나왔지?’라고 얘기하며 장난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보던 모습 그대로 참 잘 웃는 친구였고 맑고 솔직한 친구였다. 김지호를 떠올리면 그 밝은 웃음이 가장 먼저 기억난다.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던 배우였는데 지금은 만난 지 꽤 오래 됐다. 지금은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가끔씩 매체를 통해 보게 되는 모습도 참 좋고 흐뭇하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라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 (웃음)

배우 그만둘 각오까지 하며 일본으로…

<인연>까지 끝내고 보니 배우로서의 피로감이 더 가중됐다. 대중이 나에 대해 가진 매너리즘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외부적 사건 없이도 그냥 괜히 괴로웠던 시기다. ‘배우 박중훈’을 내 이미지로 잘 채워보겠다는 느낌이 어느 순간 과잉이 돼서 나에 대한 관심도나 신뢰도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즈음 <할렐루야>와 <인연> 사이에 <접속>(1997)으로 큰 성공을 거둔 한석규가 등장했다. 물론 그는 그전에 <닥터 봉>(1995)으로 데뷔하고 <은행나무 침대>(1996), <넘버.3>(1997)로 착실히 자기 기반을 다져온 상태였다. 내가 에너지를 가지고 밀고 나가는 스타일인 데 반해 그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관객을 흡입하는 스타일의 배우였다. 나에 피로를 느낀 관객들이 그 반작용으로 한석규를 주목하기 시작했던 거다. 난 지나치게 노출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한·일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서 일본어도 잘하면 나중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실 이대로 내 이미지를 답습하다가는 충무로에서 내 자리가 없어지겠다는 배우로서의 미래 걱정이 더 컸다. 아내가 재일동포 3세라 내가 신청만 하면 일본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니까, 수년 혹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일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짐을 싸서 하염없이 떠났다. 아내에게는 도쿄에서 야키니쿠집을 하면서 평생 살 수도 있을 거라는 얘기도 비장하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떠난 거다. 그래서 시부야에 있는 도쿄 일본어학교에 등록해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웃음) 정 좋은 작품이 없으면 배우를 영원히 그만둘 수도 있다는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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