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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요리] 양념의 문화사
박찬일 2009-12-31

좋은 재료는 음식을 살리고, 좋은 양념은 미각을 살린다. 유럽 사람들은 영국이나 독일 사람들이 요리를 못하는(?) 이유를 재료보다는 양념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뒤집으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식이 맛있는 건 양념 덕이라는 얘기도 된다. 그런데 두 나라에서 쓰는 양념이라는 게 원래 그 땅에서 나온 게 별로 없다. 대부분 소아시아와 중동 출신이다. 그 양념이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땅도 당연히 그 지역에 있다. 바로 터키다.

<터치 오브 스파이스>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는 그리스와 터키를 넘나들며 양념의 문화사를 으깨고 배합해서 맞춤하게 관객에게 내놓는다. 그 배합의 비밀 레시피는 물론 ‘사랑’이다. 따스한 동화 같은 구성과 꼬마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끌고 가는 영화가 <시네마 천국>을 닮기도 하였다. 그리스말인지 터키말인지 모르겠으되, 꽤 매력적인 언어의 대사도 맛깔스럽다.

1959년의 이스탄불. 양념상을 하는 할아버지를 둔 소년 파니스는 부모와 함께 그리스로 강제 이주를 떠날 판이다. 할아버지는 손자 파니스에게 인생의 영도자 같은 존재였다. 따스한 할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파니스. 그러나 할아버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파니스는 훌륭한 천문학자가 되었고, 결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탄불로 돌아와 과거를 회상한다. <시네마 천국>과 정말 유사한 흐름을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어른 파니스 역의 배우 이미지까지 서로 닮았다. 파니스가 천문학자가 된다는 설정의 단초는 소년 시절의 에피소드에서 연결되는데, 할아버지의 다락방 강의가 기막히다. 양념으로 파니스에게 우주를 가르친다. 태양은 모든 것을 굽어보는 중심이니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후추다, 비너스는 여자처럼 달콤하지만 톡 쏘는 존재이니까 계피다. 그리고 지구는 바로 우리의 존재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양념은 소금이라고.

아주 인상적인 장면 하나. 남자들이 단체로 터키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장면을 이렇게 푼다. 남자들은 목욕탕에 가서 마음을 연다, 끓어야 열리는 홍합처럼. 열대 양념처럼 열정적인 영화답게 여러 에피소드가 요리에 빗대어서 잔잔하게 펼쳐진다. 할아버지는 양념을 사러온 한 아가씨에게 색다른 요리법을 일러준다. 결혼하려는 남성의 마음을 붙들려면 저녁에 만들 미트볼에 늘 넣는 커민(강황. 카레에 들어가는 맵고 노란 가루) 대신 계피를 넣으라고 한다. 커민이 빠지면 요리가 맛없을 것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꾸한다. “뻔한 양념의 요리를 먹으면서 그 남자는 자기 생각을 할 뿐일 거야. 하지만 별난 양념을 씹으면 놀라서 상대를 생각하게 되지. 그게 인생이야”라고. 그러면서 계피는 맵고 자극적이어서 남을 유혹하기 좋은 양념이라고 덧붙인다.

이스탄불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도시가 화면에 종종 등장하며, 친근한 변두리 도시와 시장 풍경이 정겹기까지 하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터키는 아시아적 공동체가 강하고 먹는 문화도 아시아적이어서 묘한 연대감이 느껴졌다. 특히나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장면들은 60년대 우리의 모습 같았다.

최근 단관이나마 재개봉을 한다고 해서 크게 기대를 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구 어디선가 딱 하루, 그것도 한 타임이라니. 뭐, 열혈 관객이라면 가봐야 하겠지만 식당을 팽개치고 갈 수도 없어 결국 DVD 신세를 져야했다는 필자의 뒷얘기도 있다. 요리 마니아가 아니라도 강력 추천하는 영화. 인터넷을 검색하면 호평 일색의 블로거들 관람평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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