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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홈스를 성룡으로 만들다니…
김연수(작가) 2010-01-14

오랜 팬이라서 더욱 끔찍했던 영화 <셜록 홈즈>

이건 뭐, 고담시티에 간 성룡이라고나 할까? 바이올린을 들고 제멋대로 그 현을 뜯고 있는 걸 보면 유진 박 같기도 하고. 국회의원들을 한데 몰아넣고 자기 편 안 들면 독가스로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요즘 예산안 때문에 시달린다는 그분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니까 영화 <셜록 홈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 추석이면 공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예기>에 적어놓았다는 듯이 늘 찾아가서 보던 성룡 영화의 21세기 버전 같았다. 영화를 본 소감이라면 그게 다다. 왜냐하면 셜록 홈스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캐릭터이므로.

영화 <셜록 홈즈>에 나오는 셜록 홈스(라고 쓰지만 아무리 봐도 성룡이라고 읽는다) 캐릭터는 시리즈의 첫책인 <주홍색 연구>에 등장하는 셜록 홈스의 특징을 과장한 것이다. 알다시피 셜록 홈스 시리즈를 들려주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아프가니스탄 마이완드 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한 군의관 출신 존 H. 왓슨이다. 이 사람은 런던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와 함께 겉으로 보이는 것에 잘 속아넘어가기로 유명하다. 이 왓슨과 홈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가 힘 좀 쓴다고 K1에라도 나가랴

“천장이 높은 실험실 방에는 수많은 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저곳의 넓고 야트막한 탁자에는 증류기와 시험관, 푸른 불꽃이 날름거리는 작은 분젠 가스 램프들이 빽빽이 놓여 있었다. 실험실엔 오직 한 사람이 저만치 떨어진 탁자 앞에서 몸을 굽히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발자국 소리에 흘끗 뒤돌아보더니 환호성을 올리며 허리를 폈다. ‘드디어 발견했소! 내가 말이오!’”

지금 막 셜록 홈스는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에 의해서만 침전되는 시약을 발견한 참이었다. 이 시약이 있으면 얼룩이 혈흔인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분석할 수 있어서 사악한 범죄자들을 체포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홈스의 설명이다. 이런 홈스를 두고 왓슨은 ‘마치 새 장난감을 보고 기뻐하는 아이’ 같다고 설명한다. <주홍색 연구>의 첫 부분은 이렇게 홈스를 괴짜 천재로 소개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 부분만 보면 가이 리치의 영화에 나오는 성룡풍의 셜록 홈스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건 처음 만났을 때 왓슨의 눈에 비친 셜록 홈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왓슨은 스컬리만큼이나 회의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이다. 나 정도의 변덕이라고 해도 그의 눈에는 대단히 천재적인 소설가의 기행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런 식의 과장은 대중문화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셜록 홈스를 입체적인 19세기 인물, 예를 들어 과학 너머에는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신봉하는 새로운 사제로서의 인텔리 지식인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간단하게 제국의 수도에서 교육받은 쿵후스타 성룡으로 묘사하는 게 장사에는 더 도움이 된다. 그 사실을 가이 리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셜록 홈스는 절대로 성룡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된다. 물론 책을 펼치면 왓슨이 적어놓은 노트, 예컨대 “목검술, 펜싱, 권투 실력은 프로급”이라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셜록 홈스가 K1에 나갈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금 왓슨은 자기가 쓴 책을 팔기 위해서 술수를 부리고 있다.

왓슨이 사실을 왜곡하고 홈스를 비현실적인 천재로 그리는 것에 가장 반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셜록 홈스다. 왓슨이 쓴 <주홍색 연구>를 읽은 홈스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그 책은 나도 대충 훑어봤네. 솔직히 말해 난 자네를 축하해줄 수 없어. 모름지기 수사란 정밀한 과학이기 때문에 냉정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대해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거기다 낭만적인 물을 들여놓았네. 그건 유클리드의 제5공리에 연애담이나 남녀상열지사를 뒤섞은 것과 같은 것일세. 어떤 사실은 밝히지 말았어야 했네. 아니면 적어도 여러 사실을 취급할 때 공정한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했지.”

이런 홈스의 말에 왓슨의 반응은 대충 이런 식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써서 한 일에 대해 이런 식으로 혹평하는 걸 듣고 나는 화가 치밀었다. 또 내가 쓴 문장 하나하나가 오로지 자신의 활약상을 기리는 데 바쳐져야 한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짜증스럽기도 했다. 나는 베이커가에서 내 친구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남을 가르치려 드는 그의 점잔 빼는 태도 뒤에 일말의 허영이 숨어 있는 것을 수차례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게 왓슨의 본심이다. 홈스가 점잔 빼면서 추리를 설명할 때, 왓슨은 그걸 허영심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한답시고 마구 과장해서 써댄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결국에는 왓슨이 ‘그렇게 잘났으면 당신이 직접 써보슈!’라고 버티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홈스가 직접 쓴 소설이 바로 <탈색된 병사>다.

왓슨이 되고 싶은 가이 리치

이 소설에서 홈스가 설명하려는 사건이 벌어진 건 1903년 1월이었다. 이때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왓슨이 아내를 맞아 베이커가를 떠나 있었다. 홈스 자신이 사건을 설명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홈스는 왜 왓슨을 사건마다 데리고 다녔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왓슨의 주목할 만한 특성 때문이었는데, 성품이 겸손한 친구는 나의 활동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장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소설에서 홈스는 왓슨이 묘사한 것과 달리 말수가 적다. 어떻게 보면 홈스는 정신분석의처럼 의뢰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홈스가 하는 일은 그 이야기의 모순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홈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왓슨이 아쉬워진다. 왓슨이라면 교묘한 질문과 탄성으로, 상식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은 나의 단순한 방법을 천재적인 것으로 격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이야기를 하려니 그런 도움은 바랄 수 없다” 해서 결론적으로 “나는 이 셜록 홈스는 반대일세”다. 가이 리치는 왓슨이 되고 싶었나보다. 흥행에 성공하려고 셜록 홈스를 과장하는 데 급급했다. 왓슨이 어벙벙하게 자기 모습을 그린 건 그래야만 책이 잘 팔리기 때문이었다. 먹고살자고 자기 비하까지 하는 왓슨은 귀여웠지만, 홈스를 애 취급하는 가이 리치의 왓슨은 끔찍했다. 그는 셜록 홈스를 흉내내려는 왓슨 같았다. 홈스의 오랜 팬이라면 이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함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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