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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순간의 충만함을 맛보다

세속의 가치 속에서도 뚝심을 보여주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와 <페어러브>

이번에는 두편의 영화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지만 거기 담긴 어떤 것들이 내 마음을 비슷한 맥락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민환기의 다큐멘터리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백스테이지 스토리를 다룬다. 신연식의 <페어러브>는 50대 남자와 20대 젊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로맨틱코미디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홍보도 그 방향에서 되고 있지만, 그 외피 아래 담긴 것은 좀 특이하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 역시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밴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예측할 법한 그런 상황들이 펼쳐질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있다.

인물들의 내적인 견고함에 대하여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는 경제적 문제에 고민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추구하는 젊은이들, 김민홍과 송은지의 주변 상황을 따라간다. 3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다른 멤버를 영입하지만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는다. 특히 미모를 겸비한 싱어 요조가 객원보컬로 참여하면서 미묘한 갈등관계도 생긴다. 이들의 마음에 성공하고 싶은 것, 또는 먹고살 만큼 여건이 되는 것에 대한 갈증은 비슷하게 들어 있으나 그걸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다. 요조는 좀더 공세적이고 영리하다. 송은지는 그런 요조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김민홍은 밴드의 리더로서 이런 상황을 조정하면서도 좀더 완성도있는 음악을 만들기 위한 플랜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감상적인 대목이 드러나는 게 걸리기는 하지만 감독 민환기는 이 다큐멘터리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지는 않았다. 음악적 고민이나 멤버간의 인간적인 충돌이 드러나는 부분을 다루면서도 이 영화에서 슬쩍 드러나는 건 상투화되지 않는 젊은 음악인들의 내면이다. 우리가 음악적 추구라는 평범한 말로 이런 직업인들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그 무엇, 자기 안의 내적인 망명정부를 갖고 있는 이들의 뚝심 같은 것이 드러난다. 영화 중반에 김민홍과 송은지가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가 지켜본 상황 가운데 이 대목에서 그들은 가장 행복해 보인다. 바깥에서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동시대의 다른 생활인들과 교감하는 장면, 성공이나 진보나 발전이나 이런 외향적 가치 외에 내면적 충만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어떤 교감의 에너지가 생성되는 순간 그들의 삶을 부럽게 긍정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것들로만 삶이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는 그런 곤경에 처한다. 기존 멤버와 신규 멤버의 갈등, 쓸모없는 일에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다는 느낌, 어떤 분야에서든 우리가 방기하고 있는 삶의 에너지들에 대해 괴로워하고 자신의 직업적 자산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시장에서 먹고살기 힘든 강박, 이런 것들에 대해 영화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순간들의 충만함과 그것들을 덮는 더 많은 방기와 소모의 시간들을 배열하면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는 예술을 한다고 하는 이들의 삶에서도 순환되는 그 모순의 굴레를 가감하지 않고 보여준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 나서 카메라가 따라다닌 인물들의 내적인 망명정부의 견고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표현은 문학평론가인 고 김현 선생이 최인훈의 소설을 언급하며 쓴 말인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법칙에 몸을 담근 사람들 누구나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세속의 가치에 어쩔 수 없이 의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들이지만 그것과 맞설 수 있는 자기만의 버팀목, 마모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다른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연식의 <페어러브>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안성기의 얼굴 또는 사물의 클로즈업 인상적

<페어러브>에서 안성기가 연기하는 형만은 명품 카메라를 고치는 사람이다. 별로 돈도 안되는 이 일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에게 죽은 친구의 딸 남은이 접근해오는데, 남은은 기계를 고치는 그가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형만은 기계를 고치는 것은 관계를 알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게 유연하게 해내지 못한다. 소년 같은 어른 형만과 미성숙한 듯하지만 놀랄 만큼 현실적인 남은은 서로 상대에게 없는 것을 느끼고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페어러브>의 대중적 재미는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 주인공이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관계를 꾸려가는 데서 오는 해프닝을 유머로 포장한 지점에서 나온다. 그것도 물론 재미있지만 이 영화에서 은밀하게 시선을 끄는 것은 오래된 것, 사라지는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과 회한의 양가적 감정을 담는 감독 신연식의 연출이다. 형만의 작업실을 담는 카메라는 심도 깊은 화면으로 마치 오랫동안 잔상을 포착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사물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명품 카메라를 고치는 형만의 직업적 설정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 은밀한 주제는 삶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형만의 성격을 축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그런 형만의 성격에 반했던 남은은 무책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 여자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외향적인 명랑함으로 포장하면서 형만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곧 형만의 직업적 신념에 대해 작은 불만을 갖고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진가로서의 능력을 형만이 미록(??????? 확인!) 나가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

사랑과 소유, 성숙과 미성숙, 이성과 감정,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경계가 따로 없다.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각자 그들이 의탁할 만한 가치에 기대어 인생을 버텨왔다.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형만보다 오히려 어린 남은이 더 잘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탁해왔던 삶의 형태가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그 딜레마에서 이들은 끝까지 갈등하며 시작 단계에서 활기찼던 그들의 사랑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페어러브라는 말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은 각기 존재할 만한 근거 때문에 부정하기가 어렵다. 삶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인상적으로 제시된 안성기의 얼굴 클로즈업이나 여타 사물의 클로즈업이 주는 잔상이 큰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놀랍게도 <페어러브>는 마지막 장면에서 안이한 것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구획을 짓지 않는 방식으로 순간의 충만함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게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영화적 방법으로는 무리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 전 <좋은 배우>라는 저예산영화를 연출했으나 그다지 대중적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신연식은 이 영화로 역시 삶과 인물을 보는 관점이 영화적으로 만만치 않게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재능이 로맨틱코미디의 관습에 마모되지 않고 버티어냈다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