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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섬세함을 옹호하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가락
김경주(시인) 2010-03-26

러셀 셔먼의 음악 에세이 <피아노 이야기>을 중심으로

엄지손가락은 한 나라의 수도이고 다른 손가락들은 지방이다.-러셀 셔먼 암브로즈 비어스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란 건반과 관객의 영혼을 동시에 누름으로써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뉴욕 태생의 피아노 연주가이며 부소니와 쇤베르크의 제자로서 오늘날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음악 에세이 중 하나라고 불리는 저서 <피아노 이야기>를 남긴 러셀 셔먼은 훌륭한 피아노 연주란 광활한 영역에서 태어난 소리가 미지의 곳으로 소멸되어가는 하나의 소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수면 중에도 그 소화 과정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셔먼은 피아니스트의 엄지를 두고 짐승으로 태어나 귀족이 되는 손가락이라고 명명한다. 피아노 독주를 예매하려고 할 때마다 좌석표를 보고 신중을 기한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가락이 잘 보이는 좌석을 예매하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그의 손가락 예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피아니스트의 얼굴보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보이는 좌석쪽이 적합하다. 손가락은 미개척의 대륙처럼 솟아올랐다가 우리가 모르는 심해로 가라앉는다. 예민하고 애정어린 관객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들이 건너가고 있는 그 대륙의 주민이 되기도 했다가 자신의 이름을 잠시 잃어버린 채 소리를 떠도는 유민이 되기도 한다. 음감을 유랑하라! 다재다능한 지휘자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말처럼,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데려다주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 유랑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시간이라는 점에서 어떤 격렬한 사랑에 가깝기도 하고 누구도 그 악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배열된 애도의 공간이다. 얼마 전 본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에선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이 세상에는 손이 피아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선택한 손이라는 것이 있다고.

미개척의 대륙처럼

음악은 무수한 음표와 쉼표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다. 음표와 쉼표의 조상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면서 고유한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들은 서로 기대면서도 끊임없이 불화를 만들어왔다. 그들이 만들어온 사회를 사람들은 음악이라고 부르지만 음표와 쉼표가 살고 있는 시간은 ‘미풍에서 폭풍에 이르기까지’ 누구를 위한 공간도 아닌 ‘관객이나 청중을 벗어난’ 자신만의 요양원을 가꾸는 데 동참한다. 그것은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들이 열렬하게 옹호해온 진실인데 음표와 쉼표의 사업은 셔먼에 의하면 하나의 시장이라기보다 휴식처에 가까운 것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표현보다는 음악으로 가서 요양한다는 표현이 더 난폭하고 잘 짝지어진 표현일지 모른다. 그럼 안되나? 내 은유는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시는 언어에 종사하는 나의 풍습이지만 음악은 언제나 문자의 풍습을 약간은 비웃는 듯한 채로 때로는 모든 문자는 음악의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는 듯이 나를 요양해왔다. 나는 어리석게도 음악에서만큼은 여전히 수렵과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언어를 수렵하고 그 언어로 자신의 가계를 꾸리고 농사를 짓는다는 적시적인 표현만큼이나 어떤 노동 속에 음악을 꿈꾼다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 바꿔 말하면 한편의 시는 한편의 노동요이다.

인간의 편에서도 감정과 이성이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아슬아슬한 평온과 전망에 해당하는 끊이지 않는 질문들은 결국은 음악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아직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곡해로 받아들인 셔먼의 문장의 리듬을 빌리면 셔먼은 그것을 어떤 특정한 시적 상태라고 불렀다.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언급할 수는 없는 것을 감춰두고서 그것의 처참한 잔해를 애도하려면 부드러운 음악이 필요하다고.

하나의 행성이로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에 대해서 말하려는 나의 의도는 다시 존중되어야 할 것 같다. 손가락들은 피아노로부터 상승할 수 있는 전적인 허락을 받는다. 손가락들은 피아노의 연골조직이라 할 수 있는 건반을 수천 가지 비밀과 탐구의 차원으로 결합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자연을 이끌어낸다. 인간성의 다양하고 고립된 측면을 결합하면서 인간의 저급하고 상투적인 나약함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빈민굴의 지하계단에서 천상의 계단으로, 구불구불함에서 유연함으로, 수천 가지 메시지에서 하나의 근원으로 항해를 한다. 손가락들은 서로의 체혈 속으로 악보의 선율을 공급해주면서 이 세상에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종(種)처럼 퍼져간다. 손가락들은 허공을 움직여 파동의 생명체를 배양한다. 피아노 연주는 손가락들이 만든 생명체들이다. 손가락들은 스스로 만든 통교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손가락은 악절을 정확히 닮았지만 아무것도 닮지 않은 표정으로 사해를, 사막을, 풍랑을, 별빛을 만난다. 손가락들은 자신들의 은유를 정당화하면서 철저한 독거를 위해 준비된 자들의 침묵처럼, 시간의 창공에 떠 있다. 만일 관객이 독보적이고 풍요로우면서 애잔한 연주자의 침묵을 마주하고 있다면 몇억 광년의 거리에 놓여 있는 지금, 그 피아니스트의 손가락들을 하나의 행성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하나의 행성에서 갈라져 나오는 여러 개의 행성, 눈을 감은 채 고대의 빛과 어둠으로 뭉친 그들의 손가락은 인간의 악보 위에 우주의 먼지처럼 쌓여간다.

목격은 충격에 해당하지만 울림은 그 충격을 보호한다.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일이란 울림 속에 자신의 독거를 마련해보겠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눈을 감는 일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올 때 가장 적합하다. 눈을 감고 상상하는 피아니스들의 손가락을 자신의 다른 눈이라고 불러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악보는 작곡가의 해부도이며 심해이다. 작곡가의 악보는 손가락들을 상상하면서 종이에 번져간다. 연주자의 손가락들에 가장 먼저 들려주는 상상을 통해서만 작곡가는 악보를 완성해나간다. 악보는 소리의 출항이며 귀로이며 번뇌이며 망각이다. 악보는 음들의 숲이면서 나무들이다. 악보는 형식과 제한을 준수하며 리듬은 그 형식과 규율을 포용하는 상처와 모순이다. 작곡가는 악보 위에 놓인 손가락을 멀리서 들으며 그 악보를 따라가는 단 한 사람의 손가락을 자신의 사랑이라 부른다. 자신과 악보 사이의 틈을 채워줄 수 있는 소리를 상상하면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만난다. 통로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애틋한 윤리들을 배열하고 적중시킨다. 베토벤의 소나타 작품 22번 아다지오와 디아벨리 변주곡,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리스트의 피아노소나타 B단조, 쇼팽의 플로네즈,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F장조 K332, 아파시오나타의 마지막 악장이 그렇게 연주되지 않는다면 음악은 사회가 아니다. 공동체라 부를 수 없다. 다락방에 숨은 채 아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수은처럼, 그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미로를 품고 있다. 흑과 백의 건반들은 손가락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다락방이다.

셔먼은 몇대밖에 남지 않은 이상적인 피아노는 멸종위기 보호법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했다. 와이어와 펠트와 해머로 이루어진 이 상자를 위해 손가락은 성스러운 복무를 마치고 푸른 김을 일으키며 영예로운 방정식을 완성한다고. 그 소리들은 자신이 만든 요양원에 영원히 수용되어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