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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성스러운 미소를 담은 손
김혜리 2010-03-26

오귀스트 로댕, <대성당>(La Cathedrale), 1908.

결혼식 청첩장에 넣을 이미지를 권해 달라는 친구의 청을 듣고 곧장 오귀스트 로댕의 <대성당>을 떠올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대성당>을 처음 접한 뒤로 오랫동안 나는 로댕이 조각한 것이 기도를 위해 막 모아지려는 누군가의 양손이라고 무심코 믿어왔다. 최근에야 <대성당>의 아치가 각기 다른 몸에 속한 오른손, 자세로 미루어 아마도 가까이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손으로 이뤄졌음을 알아차렸다. 닿을락 말락한 <대성당>의 두손은, 남은 생을 공유하기로 결단한 연인에게 선사할 만한 이미지다. 손바닥 전체를 깊이 맞댄다면 처음에는 흡족해도 시간이 갈수록 상대의 촉감이 둔해지고 결국 사라질 것이다. 심지어는 땀이 배어 불쾌해질지도 모른다. 손을 잡는 행위로 구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결혼을 통해 서로의 몸과 영혼을 구석구석 탐사한 다음, 노년에 이르면 다시 가볍게 손을 잡고 산책하게 되리라.

로댕은 손의 위대한 감식자이자 창조자였다. 한때 그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작업장의 무수한 손 조각들을 가리켜 “어떤 손은 걷고 있고, 어떤 손은 자고 있으며, 어떤 손은 깨어 있다”고 묘사했다. 교회와 성당의 건축 양식을 깊이 탐구했던 로댕이 특별히 이 작품을 <대성당>으로 명명하기로 한 결정은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달걀 한알을 쥘 만한 압력도 들어가지 않은 관절이 그리는 우아한 아치, 그 아래 깃들어 있는 균형과 겸허, 고양감과 한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로댕이 발견한 고딕 양식이 지닌 아름다움의 요체가 아니었을까.

위대한 예술가의 비전을 갖지 못한 평범한 우리에게도 손은 충분히 성스러운 기관이다. 손은 두뇌와 더불어 인간에게 신을 흉내내는 행위를 허락한다. 손가락을 모으면 사물을 담을 수 있는 조그만 그릇이 되고, 활짝 펴면 가지가 되어 우리를 통과하는 세상의 바람을 느끼게 한다. 손은 어떤 신체 부위보다 빨리 굳고 주름져 노화를 드러내지만, 끝내는 시력과 청력이 떠나간 뒤에도 우리 곁에 남아 세상의 홈과 마디를 촉지하게 해줄 것이다. 술이든 음악이든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취했을 때 타인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을 영접한 순간 성소에 들어가고 싶은 본능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정념이 질료 덩어리 속에서 거의 뛰쳐나오려 하는 로댕의 관능적인 전신상들에 비해 <대성당>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찍어 인터넷에 올린 <대성당>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소박한 조각이 다양한 앵글과 빛의 상태에 따라 얼마나 상이한 노래를 부르는지 알게 된다. 훌륭한 건축물이 그렇듯이 <대성당>은 모든 면(面)을 통해 호흡한다. 미술비평가 베르나르 상파뉠르는, 로댕이 인간의 얼굴에 미소를 조각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러나 <대성당>의 손은 분명히 미소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