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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우리는 이미 예언 속에 살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영웅 서사, 자크 오디아르의 <예언자>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이야기는 감옥에서 시작한다. 말리크 엘 제베나는 지금 막 체포되었다(나는 그의 ‘정체성’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름뿐만 아니라 성까지 생략하지 않고 표기할 것이다. 그건 다른 인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나이는 열아홉살. 올해 성인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소년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어른들과 함께 감옥에 갈 것이다. 건조하게 질문하는 간수의 진술서 작성은 말리크 엘 제베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돈 부쳐줄 사람은?” “없습니다.” “교도소 안에 친구나 적은?” “없습니다.” “신앙은?” “네?” “예배는 드리나?” “아뇨.” “음식 알레르기는?” “그냥.” “돼지고기는 먹는가?” “아뇨, 아. 네.” “송금된 돈은 어떻게 받을래?” “글쎄요.” “경찰 폭행 말고 할 줄 아는 다른 재주는?” “전 결백합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직업훈련받을 생각은?” “글쎄요.” 말리크 엘 제베나는 말 그대로 텅 빈 기호이다. 그에게는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다. 동료도 없고 원수도 없다. 종교? 우리가 말리크 엘 제베나를 보았을 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외모를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인종뿐이다. 직업도 가진 적이 없으며, 기술도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열아홉살 아랍계 청년. 국선 변호사가 자기 수임료를 받기 위해서 서류를 내밀었을 때 그는 읽지 못한 채 가까스로 자기 이름을 쓸 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프랑스 국적. 거리에서 자란 그는 회교 문화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돼지고기를 먹으며, 아침에 알라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이제까지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6년간 단 한번도 말리크 엘 제베나가 예배를 드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방리유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 폭행을 거듭했을 것이고, 지금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 중이다. 그는 6년형을 언도받았다.

텅 빈 기호, 말리크 엘 제베나

자크 오디아르의 <예언자>는 그냥 간단하게 인물에 대한 탐구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지만 자크 오디아르는 선수를 친다. 아니, 난 그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도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당신은 그저 당신이 원하는 것만을 그에게서 보게 될 거야. 말리크 엘 제베나는 지식의 대상이기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어떤 분류에도 놓이기를 원치 않는다. 제로 기호. 텅 빈 인물. 그가 던져진 감옥. 감옥 그 자체가 어떤 장르도 아닌 것처럼 감옥은 동시에 그 어떤 나라도 아니다. 감옥은 집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자기 집에 누군가를 재우고, 대접하고, 그 안에서 주인과 손님을 가르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이방인인 장소. 모두가 손님인 공간. 차라리 자크 오디아르에게 감옥은 전략적 기호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감옥을 하나의 세계로 다룬다기보다는 서로 교차하는 수많은 전략들의 집합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말리크 엘 제베나는 전략을 배워나간다. 그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 말리크 엘 제베나는 권력을 얻고, 글을 배우고, 돈을 번다. 이 과정은 자크 오디아르가 텅 빈 기호를 채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이 과정의 일관성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망설였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복잡하지도 않았으며, 인물이 다층적인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 반대였다. 이야기는 과도할 정도로 고전적이었으며, 인물은 동물에 가까웠다. 벌거벗은 말리크 엘 제베나. 인간이라는 정글 속에 던져진 새끼. 동물은 조금씩 인간의 교활함을 배워나가면서 우리 앞에 권력과 돈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렇다면 자크 오디아르는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인가? 동의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계속해서 인종들에 관해 명명하고(이를테면 특별하게 자막들), 암시를 걸며(반복적인 대사 안의 호명), 범주를 설정하고(무리지은 그룹들의 동선), 그런 다음 관계를 교정한다. 그러나 자크 오디아르는 정확하게 거기서 멈춘다. 그런 다음 갑자기 이들 사이의 관계의 방향을 장르 안으로 돌린다. 장르가 되어버린 인종적 긴장. 혹은 자크 오디아르는 감옥 안의 수많은 형법적인 범주들, 사법적 장치, 법률적 정보를 동원해서 인물들의 벽과 창살을 만들고 있지만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인종적 기호들 사이의 차이를 해석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이때 자크 오디아르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방법을 동원한다. 말 그대로 도식. 그런 다음 장르와 우화 사이에서 기묘하게 줄타기를 시작한다. 혹은 다큐멘터리처럼 연출된 이 영화의 외양은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악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처럼 펼쳐진다. 말하자면 장르들의 세계. 도식과 약속들.

프랑스 감독의 ‘그들’

먼저 도식. 두개의 힘. 누가 더 악당인지 알 수 없는 정글. 아랍계 죄수들과 코르시카계 죄수들의 감옥 안에서의 권력 다툼. 그 사이에서 지금 막 감옥에 들어온 아랍계 말리크 엘 제베나는 이미 이 세계를(이 공간을? 이 건물을?) 지배하고 있는 코르시카계 죄수들의 우두머리 세자르 루치아니의 명령에 따라 (아마도 세자르의 ‘감옥 바깥’ 보스인 재키 마르키지를 불편하게 만들) 공판 증인으로 설 때까지 여기 머무는 아랍계 죄수 레예브를 살해한다. 그런 다음 말리크 엘 제베나는 그 공로로 세자르 루치아니의 하인처럼 그의 ‘편안한’ 잡일을 한다. 코르시카 그룹 안의 아랍계 청년. 그러면서 재빨리 세상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신임을 얻은 말리크 엘 제베나는 세자르 루치아니의 도움을 얻어 외출을 시작한다. 그는 감옥 안과 바깥을 드나들면서 돈과 권력을 조금씩 쌓는다.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예정되어 있다. 마지막 순간 말리크 엘 제바나는 세자르 루치아니를 배신하고 그의 보스인 재키 마르키지의 편에 서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그리고 출소한다.

유혹은 명백하다. 이 이야기를 아랍계 이민과 코르시카계 민족 사이의 갈등으로 놓고 한 국가 안의 이민과 소수민족 사이의 모순으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밀고 나가기는 망설여진다. 누구보다도 자크 오디아르는 이 질문을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쟁점은 유행이며, 무언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교정했다는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유럽영화에서 국가와 인종은 겹쳐지지 않는 두개의 지도이다. 만일 이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다면 <예언자>보다 훨씬 좋은 예가 있다. 압델라티브 케시시의 <생선 쿠스쿠스> 혹은 라바 아뫼르-자이메케의 <아잔>은 그 작은 대답이다. 하지만 자크 오디아르는 그렇게 이야기를 진전시킬 생각이 없다. 그냥 간단한 반문. 프랑스 감옥에는 아랍계와 코르시카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감옥에서 그들을 수감하는 데 분리정책을 쓰지 않는다.

<예언자>를 보았다고 해서 아랍계 이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며, 코르시카 민족전선이 범죄조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걸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예언자>에는 그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집시 조르디는 기꺼이 말리크 엘 베제바와 우정을 나눈다. 이집트 갱단들. 이탈리아 마피아들.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언어들. 프랑스어. 아랍어. 코르시카어. 그들 모두가 프랑스라는 나라의 감옥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프랑스 아닌 할리우드 혈통을 이어받은

무엇보다 <예언자>를 보다가 종종 길을 잃는 기분이 드는 것은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때다. 처음에는 내가 영화를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중간 중간에 자막이 떠오른 다음 자크 오디아르가 우리를 조롱하듯이 따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언자>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구조적으로 맞추지 않았다. 말리크 엘 제베나를 시종일관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는 관심을 이리저리 돌린다. 이때 그러한 곡선이나 인물의 편중, 이따금 상승하는 힘의 순간을 내버려두거나 무참하게 추락하여 처박힐 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장인물들은 영화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시나리오 자체를 느슨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언자>에서 자크 오디아르는 고전적 의미에서 연출자에 머물고 싶어 한다. 나는 이 이상한 이야기의 방식 때문에 끝까지 자막을 보았다. (자막에 따르면) 이 영화의 원래 아이디어는 압델 라우프 다프리의 것이며, 그런 다음 시나리오를 압델 라우프와 니콜라 푀파이리가 썼다. 자크 오디아르는 그 시나리오를 토마 빌드갱과 다시 각색했다. 말하자면 각색 작업에 원작 시나리오작가들을 참여시키지 않았다. 물론 나는 원작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두개의 시나리오가 한 영화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물과 상황은 번번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으며, 자크 오디아르는 그것을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불균질, 불연속, 사건들 안의 우물거림, 종종 거기 보이지 않는 텍스트들이 있다는 인상, 침묵에 가까운 수다들. 나는 <예언자>가 새로운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 다음 약속들. <예언자>를 본 다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프랑스영화가 아니었다. 이미 많은 동료들이 지적한 것처럼 감옥 안의 코르시카계 ‘대부’ 세자르 루치아니를 연기하는 닐스 아르스트럽은 <대부>의 돈 콜레오네를 연기한 말론 브랜도의 제스처와 거의 동일한 아이코노그래피에 가까운 도상적 재현을 보여주고 있다. 자크 오디아르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자크 오디아르는 로베르 브레송의 <한 사형수가 탈옥했다>를 만들 생각이 없으며, 그렇다고 자크 베케르의 <구멍>을 만들지도 않았다. 구태여 자크 오디아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프랑스영화는 조세 조반니와 앙리 베르누이 사이 그 어딘가이다. 하지만 <예언자>를 보면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이걸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분에 빠졌다. 두편의 할리우드영화. <예언자>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를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탈출>과 서로 뒤섞은 것처럼 보였다. 쿠바에서 마이애미로 온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의 ‘자수성가’ 이야기는 말리크 엘 제베나와 겹치고, 감옥에서 안과 바깥을 오가는 앤디 듀프레인(톰 행크스)의 감옥 안에서의 거래는 아이디어를 그대로 빌려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토니 몬타나는 말리크 엘 제베나보다 비극적이고, 앤디 듀프레인은 훨씬 낙천적이다. 하지만 비유는 거기까지이다.

할리우드 필름누아르의 컬러 버전처럼…

왜 말리크 엘 제베나는 두명의 미국인보다 덜 비극적이고 덜 낙천적일 수 있을까? 그가 그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다큐멘터리적인 묘사를 내세운 리얼리즘 영화인가? 슈테판 퐁텐느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렇게 찍고 있다. 대부분의 장면은 카메라를 들고 찍었고, 필요 이상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그런 다음 종종 말리크 엘 제베나의 심리적이거나 육체적인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말리크 엘 제베나를 연기하는 타하 라힘은 얼굴의 거의 흉터에 가까운 상처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며,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고통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는 다른 연기없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떤 믿음 같은 것을 얻는다. 지문과 대사를 생생하게 만드는 몸. 그러나 왜 말리크 엘 제베나의 얼굴은 초상화가 되지 못할까?

이 영화가 말리크 엘 제베나에 대한 탐구처럼 보이는 것은 자크 오디아르가 진지하게 이 인물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카메라의 스타일에서 오는 착시효과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부등가교환이 있다. 인물은 주어야 할 것이 없는데 카메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이때 점증하는 인물의 소외가 신기하게도 말리크 엘 제베나의 고립을 강조한다. 자기의 몸으로 실천하는 연기. 상처가 보증하는 고통. 그때 주어진 몸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하는 배우는 인물을 위한 재료처럼 잡아먹히기 시작한다. 자크 오디아르는 카메라 앞에 던져진 육신을 온통 남의 이야기를 채우는 데 ‘써먹기’ 시작한다. 사실상 내내 고통받고 있는 말리크 엘 제베나의 내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에게 보아야 할 내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텅 빈 기호가 되어버린 인물. 뼈와 고기에 가까운 육신. 채워넣어야 할 책장. 그의 스승들. 이때 카메라의 관찰은 어쩌면 인물의 탐구와 겹칠지 모른다. 그러나 관찰과 탐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상황이며, 그 상황에 던져진 인물의 행동이며, 그 행동의 동선이 이 영화의 이야기이다. 자크 오디아르는 영화를 진행하면서 차례로 그의 내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카메라를 감옥 안에 가둬둔 영화이다. 갇힌 동선. 이따금 바깥에 나가긴 하지만 다시 감옥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포물선을 그리는 커다란 원, 어쩌면 말리크 엘 제베나와 일심동체가 되어버린 카메라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때 카메라는 감옥이라는 장소에 대해서 물리적으로 한계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동시에 질료적으로 느껴보지도 못한다. 여기서 감옥은 말 그대로 무대이다. 나는 이 말을 비유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크 오디아르가 자신의 미장센을 연출하면서 정말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카메라는 감옥 안을 보여주거나 느껴보는 대신 차라리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감옥 안의 빛과 그림자는 <예언자>가 사실주의적인 영화라기보다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그림자는 만들어졌고, 감옥 안의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창문의 반대편에서도 인물의 등 위에 떨어지는 빛. 그때 이 빛은 인물들의 내면 심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 빛은 말리크 엘 제베나의 심리적 변화를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빛과 그림자는 오로지 상황을 재빨리 설명하고, 겁주고, 그런 다음 몰아세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예언자>의 빛과 그림자는 독일 표현주의영화라기보다는 1940년대 할리우드 필름누아르의 컬러 버전처럼 보인다. 마치 <예언자>가 필름누아르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이다.

죽은 레예브의 재등장

무대로서의 감옥,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감옥. 아니, 어떤 의미에서 장르로서의 감옥. 이때 <예언자>는 감옥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자크 오디아르는 감옥의 사회적 의미나 심리적 기제, 혹은 문화적 장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더 설명하고 있지 않다. 감옥은 차라리 종종 호텔처럼 보이기도 하고 학교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언자>에서 감옥은 은유인가? 푸코가 말했던 배치의 개념에 관한 잘 알려진 설명. 만일 문을 안에서 열 수 있으면 호텔이고 바깥에서만 열 수 있으면 감옥이다. 혹은 알튀세르의 반문. 감옥과 학교가 무슨 차이가 있는데? 말리크 엘 제베나는 감옥에서 단지 범죄의 기술뿐만 아니라 글자도 배운다. 세자르 무리에게 신문을 배달만 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구석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읽기 시작한다. 말리크 엘 제베나가 문맹을 벗어나는 장면은 그가 자립하는 신들과 교차편집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자크 오디아르의 감옥에 대한 연출(이 지닌 무대적인 외설성)을 좀더 밀고 나가고 싶다. 명백히 <예언자>는 영화 전체를 무대극처럼 진행하고 있었다. 자크 오디아르는 모든 장면을 카메라를 들고 찍고, 때로 교차편집을 동원하고, 혹은 플래시 포워드를 동원해서 시제를 뒤섞기도 하고, 빠른 점프컷으로 장면을 생략하면서 이야기를 건너뛰는 대신 그 사이를 음악으로 묶으면서 마치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진행을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거의 대부분 무대극과 같은 장면들을 감추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무엇보다도 말리크 엘 제베나가 살해한 레예브라는 존재 때문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가 처음 살해한 사람. 레예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말리크 엘 제베나를 말리크 엘 제베나답게 만들어준 사람. 레예브는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조언을 해준 사람이다. 마약 살 돈을 주는 대신 ‘빨아달라고’ 요구를 하지만 그의 감방에 왔을 때 레예브는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커피를 마시겠냐고 권한 다음 책을 가리키며 읽어보았냐고 물어본다.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무도 말리크 엘 제바네에게 커피를 권한 사람은 없으며 책을 읽었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다. 그런 다음 감옥에도 학교가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도 레예브다. 물론 재빨리 설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건 말이지, 그러므로 레예브는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은유적인 상징적 아버지이란 뜻이야. 남근. 글자. 읽기. 쓰기. 학교.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죽인 다음 자기의 정체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끔찍할 만큼 뻔한 오이디푸스 읽기. 자크 오디아르도 그런 식의 도식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레예브는 여기서 자기 역할을 끝내고 퇴장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말리크 엘 제베나 앞에, 곁에, 혹은 등 뒤에서 다시 등장한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이때 레예브가 말리크 엘 제베나의 죄의식 때문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말리크 엘 제베나는 단 한번도 자신이 살해한 레예브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레예브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기에는 뒤집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명백한 프로이트적인 사례마저 등장한다. 레예브는 마치 자기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듯이 나타나서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생일 노래를 불러준다. 하지만 자크 오디아르는 갑자기 사례를 뒤집어놓고 이 도식을 비웃는다.

오이디푸스는 햄릿이 되고

말리크 엘 제베나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마르세유에 거래를 하러 떠나기 전날 밤 그는 꿈속에서 내일 마주치게 될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사슴들을 본다. 그가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계속 잠든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때 온몸에 불붙은 레예브가 나타난다. 이 장면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일곱 번째 장 꿈-과정의 심리학을 시작하면서 든 사례의 뒤집힌 장면이다. 약간 길긴 하지만 인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 어떤 아버지가 병든 아이의 침상 옆에서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는 아이가 죽은 다음 옆방으로 가 휴식을 취하면서 아이의 죽은 시신이 커다란 촛불들로 둘러싸여 안치된 곳이 보이도록 방문을 열어놓았다. 한 노인이 그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시신 곁에 앉아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몇 시간 잠을 잔 뒤, 아이가 침대 옆에 서서 자신의 팔을 잡고 비난에 차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제가 불타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그는 잠에서 깨어나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 밝은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잠이 들었고, 불이 붙은 채 넘어진 촛불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의 수의와 한쪽 팔이 타고 있었다.”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펴냄)

그러나 <예언자>에서 죽은 사람은 레예브이며, 온몸에 활활 불이 붙어 타오르는 사람도 레예브이다. 사례는 모호하고, 설명은 재치를 요구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정신분석의 도식을 밀고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레예브가 꿈인지, 혹은 유령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는지에 대해 정의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크 오디아르 스스로 이 모든 해석의 지평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레예브는 밤에도 나타나지만 낮에도 나타난다. 꿈에서 나타나지만 깨어 있을 때도 나타난다. 만일 유일한 일관성이 있다면 레예브는 오로지 말리크 엘 제베나의 감방에서만 출현한다. 그러므로 레예브는 차라리 아버지라기보다는 감옥 그 자체에 대한 의인화처럼 보인다. 이때 그의 출현은 어딘가 모르게 말리크 엘 제베나를 셰익스피어적인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다. 죽은 아버지의 유령, 혹은 환영. 말리크 엘 제베나는 거의 햄릿 같은 상황에 놓인다. 또 다른 무서운 아버지 세자르 루치아니. 오이디푸스는 햄릿이 되고, 자기가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던 말리크 엘 제베나는 이제 자기가 죽여야 할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 생물학적 살인으로부터 사회적 살인에로 옮겨갈 때 말리크 엘 제베나에게 이 과정은 정확하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배우는 그 자신의 성장의 유효성에 대한 대답이 된다. 이 과정에서 말리크 엘 제베나는 동시에 카리스마를 배운다. 그는 카리스마를 누군가에게서, 말하자면 아버지에게서, 빼앗아오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그것을 얻어낸다. 이때 이 획득은 완전히 거짓된 해결책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가 좀더 많은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점점 더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그의 곤궁은 커질 것이다. 그의 두번에 걸친 살해가 바로 그 교훈이다. 그는 배움을 얻지만 그 과정의 교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결국 그도 누군가에게 목을 면도날에 베이거나, 운 좋게(혹은 운 나쁘게) 그것을 피한다면 자기의 하인에게 배신당하고 추운 날 초라하게 혼자서 양지를 서성거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예언자>는 거기까지 밀고 나가지 않는다. 자크 오디아르는 환영적 형식의 서사에 머무는 데 만족한다. 그러므로 말리크 엘 제베나는 영웅처럼 보인다. 텅 빈 기호로부터 사려 깊은 (거짓) 영웅에로의 변모.

예언의 능력은 정말 있는가? 누구에게?

여기서 말리크 엘 제베나를 기호로부터 영웅에로 도약시키는 레예브를 무엇으로 성립시키는가. 나는 이 질문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예언자>는 그 반대로 연출된 영화이다. 거기에 없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비존재. 하지만 자크 오디아르는 레예브를 출현시키면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할 때와 어떤 차이도 두지 않는다. 우리를 놀라게 만들 생각도 없으며, 거기서 어떤 신비한 효과도 주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영화적 특수효과도 없다(물론 옷에 불이 붙는 장면은 그렇지 않다). 그는 문득 나타났다가 다시 그의 곁을 떠난다.

이때 우리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과 만난다. 그러므로 죽은 레예브의 유령으로부터 말리크 엘 제베나는 예언의 능력을 물려받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마치 그런 것처럼 편집되어 있다. 그런데 레예브에게 정말 예언의 능력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의 운명을 예지하지 못하고 살해당한 것일까? 운동장에서 누가 농구공을 골대에 넣는가, 를 예언하지만 그건 이미 죽은 레예브이다. 그때 그 레예브가 유령이 아니라 말리크 엘 제베나의 환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예언의 능력이 말리크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언자>에 관한 가장 따분한 해석은 말리크 엘 제베나가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마침내 ‘40일의 낮, 40일의 밤’에 걸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여 마호메트를 떠올리게 하는 예언자로서 새로운 조직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설명할 때 이 영화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된다. 자크 오디아르는 지금 종교적인 기적이나 계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는 회교 문화의 기호들에 대해서 거의 다루고 있지 않으며, 마호메트의 그림자는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는 자기의 행위를 주인의 담론에 내맡기지 않는다. 그의 비천한 삶의 결단의 한 조각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일까? 이 영화 속의 누구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 스스로도 그런 믿음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해석의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예언자>의 덫이라고 생각한다. 자크 오디아르는 현상들 너머에 해석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불가지의 궁지에로 몰아넣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대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설명인 것처럼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설명의 판본 사이의 역설) 이 모든 긴장을 흐릿하게 만든다. 이때 자크 오디아르는 애매한 태도로 논쟁을 피한다. 한국말 제목으로 번역한 <예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정관사와 부정관사 사이의 이상한 선택이다. <예언자>의 프랑스 제목은 <Le prophete>가 아니라 <Un prophete>이다. <(바로 그분)예언자>가 아니라 <(그저)예언자>이다. 수많은 예언자 중 한 사람.

온갖 우글거리는 기호들 사이의 교란

물론 이 영화는 시련을 통해서 성장하는 영웅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에게 부여하는 어려운 과제, 차례로 난관을 넘어가는 고비들. 마치 계단과도 같은 신분의 상승. 불행과 그 불행에 대한 반응. 신비한 도움. 마술적 해결. 새로운 동료들. 증여자들과 원조자들. 모티브로서의 적들. 그리고 왕좌즉위. 이것은 자크 오디아르에게 새로운 줄거리가 아니다. 그는 줄기차게 이상한 상황에 놓인 영웅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영웅 서사이다. 그것은 상승이 아니라 추락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는 권력을 움켜쥘수록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으며, 돈을 모을수록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며,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서 배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사실상 그는 거의 괴물에 가까워진다. 말하자면 말리크 엘 제베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된 다음 감옥에서 나간다. 그것이 감옥의 교육이며, 범죄의 학교로부터의 배움이다. 이때 자크 오디아르가 <예언자>를 만들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랑스영화의 세리 누아르가 아니라 할리우드 갱스터영화의 고전주의(속의 비극적인 영웅 주인공들)에로의 복귀이다.

왜 이렇게 이상한 영웅 주인공이 프랑스 대중영화 안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 그것이 점점 다민족 국가가 되어가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영화의 대답인 것일까? 말하자면 이제 이민족으로 넘쳐나는 두 사회 사이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유사성 속에서 벌어지는 영화 안의 장르적인 조건의 친화성이라는 문제.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자크 오디아르는 오마주에 빠져들지 않는다. <예언자>는 그런 의미에서 할리우드 바깥에 놓인 할리우드영화이다. 여기에는 갱스터영화와 필름누아르에 대한 고전적인 장르의 약속이 범람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향수나 오마주가 없다. 그 반대로 <예언자>는 온갖 우글거리는 기호들 사이의 교란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는 영웅 서사인가, 악당 피카레스크 우화인가? 성장담인가, 수난극인가? 필름누아르인가, 세리 누아르인가? 갱스터영화인가, 심야총서 로망인가? 사실주의적 다큐멘터리인가, 표현주의 영화인가? 디아스포라인가, 엑소더스인가? 차라리 이들 사이의 교란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약속이며 방법론이다. 자크 오디아르는 <예언자>가 한 가지 방법으로만 분류되기를 원치 않는(것처럼 보인)다. 혹은 거기에 어떤 통일적인 마법의 순간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우리 시대 영화의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는 즐거움. 혹은 어떤 공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공감대. 그렇게 함으로써 파시즘에 가까운 합의를 피했다는 유럽 대중영화의 안도의 한숨. 자크 오디아르가 가장 성공적으로 해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국면의 코드들과 기호로 이루어진 이 모든 모순과 갈등의 층위들 사이에 놓인 다양성 사이의 적대와 불가능성을 하나로 상징화하는 데 스스로 실패한 상태로 남겨놓아야 한다는 시도이다.

21세기 프랑스, 우리의 세기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전형적이면서도 모호하다. 아랍계 죄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말리크 엘 제베나는 이제 새로운 보스가 되었다. 그는 더이상 세자르 루치아니가 불러도 그 자리에 가지 않는다. 이제는 세자르 루치아니가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말리크 엘 제베나의 동료들이 그를 구타하고, 세자르 루치아니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되돌아가 이제는 혼자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말리크 엘 제베나는 6년 만에 출소한다.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자 저 멀리 동료(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마중을 나와서 손을 흔든다. 하지만 말리크 엘 제베나는 흘낏 본 다음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자기가 형이라고 불렀던 남자 리야드의 아내 자밀라와 그의 어린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리야드는 죽기 전에 두 사람을 부탁했고, 말리크 엘 제베나는 약속을 했다. 자밀라에게 물어본다. “다음 버스가 오려면 얼마나 남았죠?” 대답한다. “30분 정도요.” 그러자 곁에 서서 말한다. “좀 걸을까요?” 자밀라가 물어본다. “머물 데가 있나요? 우리 집에 머무세요. 그이 방이 비었으니까요.” 비어 있는 한집의 가장의 방.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그 뒤에서 검은 차들이 줄을 지어 따라온다. 아마도 말리크 엘 제베나를 따르는 무리일 것이다. 혹은 말리크 엘 제베나가 이제 보스가 되었음을 알리는 장르적인 약속의 기호일 것이다. 이것이 성장의 실패인지 성공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나는 여기서 단지 도덕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는 손으로 들고 찍은 카메라로 시작하였다. 물론 이 마지막 장면도 들고 찍었다. 그러나 마치 세워놓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선 카메라. 이때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한 이 영화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로 끝난다. 카메라도 마치 장르의 약속에 순종한다는 것처럼 얌전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던져진 현실로부터 상징적인 질서의 규칙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일까? 말리크 엘 제베나는 앞으로 그의 동료들을 뿌리치고 자밀라와 (그의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새 삶을 살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그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그의 동료들?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자동차들은 아랍계 동료들인가, 아니면 (‘배신한’ 세자르 루치아니를 ‘배신한’ 대가로 얻게 된) 재키 마르키지의 선물인가? 그냥 간단하게 말리크 엘 제베나는 아랍계의 동료들과 일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재키 마르키지가 이끄는) 코르시카계와 일하게 될 것인가? 좀더 냉소적으로 대답할 수도 있다.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속편을 준비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기묘한 색분해를 본다. 검은색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흰색으로 이루어진 화면. 하얀색 기둥 사이에 인상적인 붉은 색. 자밀라의 청바지. 하얀색과 붉은색과 파란색. 평등과 박애와 자유. 프랑스의 국기.

나는 말리크 엘 제베나가 텅 빈 기호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그런 다음 자크 오디아르는 그 기호 안을 서로 다른 암호와 징후들, 명백한 신호, 문서와도 같은 계열, 증명사진과도 같은 담론들, 서로 다른 수준의 영화적 약속들을 뒤죽박죽으로 뒤섞어놓았다. 그 안에 고유한 세계란 없다. 전도된 세계화. 말리크 엘 제베나는 누구인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 불투명성. 그 대신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다. 프랑스 시민. 이제 막 스물다섯살이 된 남자. 한눈으로 보아도 아랍계 이민. 혼자 있을 때조차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신호. 프랑스의 운명을 말하는 그저 또 하나의 예언자의 예언. 그 예언들이 모여서 21세기 프랑스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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