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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봄봄봄
이주현 2010-04-16

후배가 전화로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예전부터 만나온 남자친구와 결혼 날짜를 잡았다고 했다. 5월의 신부가 될 후배에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후배는 수줍게 ‘네’ 하고 대답했다. 청첩장을 보내겠다는 후배의 목소리는 행복에 젖어 있었고, 그 목소리에 질투가 나서인지 나도 결혼이란 게 조금 하고 싶어졌다. 남자도 없으면서.

또 다른 결혼 소식도 들려왔다. 호주로 유학간 친구가 9월에 결혼한다고 했다. 둘의 첫 만남 얘기가 은근히 로맨틱했다. 친구가 집을 세놓았고 남자가 집을 보러 왔다가 친구에게 첫눈에 반했다. 훗날 남자는 ‘이렇게 낡은 집은 처음이었지만 당신 때문에 그 집에서 살았던 거요’라고 말하며 고백했단다. 듣자하니 친구의 결혼 상대자는 상당한 재력의 소유자다. 친구는 남자에게 값비싼 외제차를 선물받았고, 결혼을 하면 당분간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이가 나이다보니 요즘은 친구들을 만나 결혼 얘기를 자주 한다. 모두들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돈 많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갔으면 좋겠다는 거다. 나 역시 최근 들어 그런 말이 입에 붙었다. 주체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을 외워도 소용이 없다. 이상한 건 그 말을 내뱉고 나면 힘이 쭉 빠진다는 거다. 돈 많은 남자 만나 시집 갈 확률이 낮아서 그렇다기보다 그런 말을 하는 생기 잃은 내 모습이 처량해서다. 언제까지고 사랑 하나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매일매일 김밥에 라면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백수인 남자친구를 둬 매일 김밥과 라면과 햄버거만 먹는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 사주는 남자가 만나고 싶어지더라.

사랑하는 사람 얼굴만 봐도 배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사람도 사랑도 변하는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볼 때만 해도 택시 타고 강릉까지 날아가는 건 아무 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택시 타고 강남가는 것도 무섭다. 왜 나이를 먹으면 순수함을 잃고 까맣게 때가 탈까. 왜 계산에만 밝은 속물이 되어갈까. 미친년 널뛰듯 짓궂은 봄날에도 개나리꽃이 피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