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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섬세함을 옹호하다] 샤갈의 몽상어편람
김경주(시인) 2010-05-28

샤갈의 그림과 그 속에 보이는 색(色)에 관하여

‘나는 나의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배열한 것일 뿐이다.’ -샤갈

‘새로운 종족들로 가득한 새로운 대륙 내부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고장이 이상한 동물, 털이 희고 발톱은 진홍색으로 불충과 충실의 신기한 종합을 드러내는 그런 동물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리하여 더없이 놀라운 몽상적 종합이 시작된다. 우리는 이러한 몽환적 종합이 자연적인 기본 요소들에 모험을 도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중

밤마다 자신의 꿈에 등장하는 우리는 사건의 목격자이자 용의자이다. 우리는 밤마다 꿈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의자적인 태도로 동시에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기묘한 의식을 중첩하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반복한다. 엥겔스식으로 말하자면 꿈은 생산력/(용의자)과 생산관계(목격자)를 표현하는 이중구조를 품고 있다. 무의식이 마련한 그 사건에 우리는 무방비로 노출되면서도 그 감각의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의 주역은 분명 무의식이지만 그 무의식을 목격했다고 생각하는 목격자의 의식에는 무의식과의 착상의 잔여감이 남아 있어야만 꿈을 꾸고 있다는 자기 신뢰가 가능하다. 똥을 누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일종의 잔변감처럼, 잔변감을 뱃속의 장과 항문까지의 불편한 거리감으로 여기는 우리의 솔직한 똥구처럼, 입은 그것을 더듬는 데 쓰이는 통로다. 입은 꿈속에선 길을 자주 잃는다.

꿈꾸는 일이란 그 속에서 새로운 언어 체위를 경험하는 일이다. 바꿔 말하면 언어는 꿈속에서 체위를 바꾸면서 새로운 꿈꾸기도 한다. 샤갈의 그림들은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하는 색의 자연생장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샤갈의 색들은 자연수이다. 샤갈의 색은 언어의 배후에 잠복해 있다. 샤갈이 사용하는 색은 언어가 자아와 타자의 성숙한 관계를 위해 노력할 때 피치 못하게 폐기해야 하는 공동체를 표현한다. 드만이 말한 <감옥으로서의 형식주의>를 피하기 위해 샤갈의 색들은 계열화된 감각을 버리고 환상의 은신처를 공급받는다.

몽상의 내력에 우화를 그려넣다

샤갈의 색은 일종의 몽상어편람이다. 샤갈은 몽상의 내력에 우화를 그려넣었다. 그 우화들은 그림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꾸면서 선뜻 말해지려는 세속의 ‘회화’를 진정시킨다. 샤갈의 색은 망각을 두려운 것으로 애쓰려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악몽이 되어버린다. 샤갈의 색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망각을 배급하면서 악몽의 골격을 깎아나간다. 샤갈의 색에는 악몽의 상류로 갈 수 있는 흐름이 있다. 그 악몽의 상류에 도달하면 우리에게 ‘본다는 것의 의미’가 비현실, 부재, 비존재, 상상을 의미하기 위해 충분히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묻게 하고, 몇개의 진실된 단어들만 당신의 심해(深海)에 기능하게 하고, 인격화된 색이 당신을 달래기 시작한다. 샤갈의 색은 당신을 치유하기 위해 북극흰올빼미의 몸으로 하늘이 기어 올라가고 두손을 잡고 물구나무를 선 연인은 고통을 가볍게 상승시키 위해 선과 점들에 공기의 새로운 생명성을 불어넣으며 어떤 사실로부터 분명하게 물러가기 시작한다. 샤갈의 색은 비구상과 구상 사이에 성(城)을 쌓고 그곳에서 당신이 충분히 체험할 수 있도록 체류를 권한다. 샤갈의 몽상 속에서 당신은 ‘갑자기 모든 것이 심각해지고 모든 것이 사실이 되는’ 경험을 하거나 베개를 안고 잠들면 꿈에 고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드니 디드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꾸는 세계에 가서 더이상 회화적인 것이 아닌 어떤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샤갈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당신에게 먼저 얼굴을 지울 것을 요구한다. 환상이란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사실을 면제받는 것이므로 먼저 우리의 시야가 가리고 있는 전통에 반기를 들라고 샤갈은 시선의 중요성보다는 회화의 진정한 성격을 위한 색의 공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메틀로 퐁티는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에 있다고 말한다. 샤갈의 몽상에선 누군가가 혹은 어딘가가 구출되거나 실종된다. 샤갈의 색들은 누군가에게 미끄러지거나 어딘가로 흘러간다. 샤갈의 색들은 누군가를 데리고 꿈을 꾸거나 다른 곳의 꿈이 깨이지 않도록 미소 짓게 한다. 샤갈의 색들은 우리의 시선을 소화시키면서 물고기의 뱃속으로 안내하거나 휘파람 소리를 모래사장까지 나르거나 저물 무렵 당나귀의 앞발에 쌓이는 종소리를 보여주거나 새벽 고래의 눈꺼풀에 맺히는 별빛에 이르거나 촛불이 벽에 번지는 얼룩의 둘레를 환하게 하거나 술병 속에서 춤추는 바이올린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샤갈의 색은 양떼의 졸음이거나 샤갈의 색은 흰 장갑 속의 부드러움이거나 샤갈의 색은 모든 문제를 적은 작은 종이에 포도주를 적셔주는 기도이다.

샤갈의 몽상을 바슐라르는 “아침이 다소 밝아옴에 따라 우리가 깨어나 영혼을 되찾을 때에도 우리는 요나처럼 방금 바다에서 구출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고 기록했다. 샤갈은 하나의 ‘우화’를 떠올리며 하나의 동판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름은 세레에서 겨울은 사보이에서 보냈다. 그리고 30년 뒤 메츠 대성당의 스테인글라스를 디자인하면서 그 동판화들에 흘려넣었던 사람의 눈을 떠올렸다. 판화에는 그려넣지 못했던 푸른 열기가 번지고 있는 눈동자의 색들을.

입속의 침엽수림을 머금은 채 공기를 떠도는

샤갈의 주인공들은 입속에 침엽수림이 있다. 샤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입을 열지 않는다. 입을 벌리면 그 침엽수들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목수들의 세계에서 깊은 숲일수록 좋은 나무가 나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샤갈의 주인공들은 입속의 침엽수림을 머금은 채 공기를 떠돈다. 마치 입안의 침염수림들이 몸을 들어 올리고 있듯이, 아스피린이 컵 속의 물에서 녹듯이, 아주 특별한 계절 속의 나뭇잎들처럼, 이탈리아 인형극에 등장하는 꼽추 폴리치넬라들처럼, 오로지 자신의 환상과 순수한 교환을 하듯이 떠다닌다. 침엽수가 머금은 차갑고 시린 물기들처럼, 아주 깊은 숲속의 물방울 속에 거주하는 구성들처럼.

러시아 황실 발레단의 최고 수석 발레리나였던 산헤드린은 192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앙드레 대공과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뒤 파리에서 샤갈의 그림을 자주 보았다. 체카라고 불리는 초기 소련 비밀경찰기관은 샤갈의 그림을 첩보암호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연출가이며 배우이고 연극 제작자이기도 한 메이에르홀트는 비사실주의적인 연극에 도전적인 실험을 자주 했는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배반하고 신비주의를 옹호한다는 죄명으로 고발당한다. 그는 자주 샤갈의 그림을 인용하며 속박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실험에 대한 예술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라뤼슈는 샤갈뿐 아니라 페르낭 레제, 로베르 돌로네, 사임 수틴, 앙리 로랑, 알렉산더 아르키펜코, 알베르 글레즈, 앙드레 레코 등이 살았던 곳이다. 그곳은 자작나무의 하늘이 푸른 연청색 스카프 같은 색조를 띠고 성상화에 그려진 성인들의 축복과 평화로움이 유명한 곳이다. 샤갈이 꾸었던 꿈에 대해 꿈꾸어볼 기회가 온다면 그 몽상을 자신의 입속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를 구경하는 것이라고 다짐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