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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놀라운 영화, <옥희의 영화>

<옥희의 영화> 첫 시사 첫 공개

<옥희의 영화>

일시 9월13일 4시30분 장소 CGV왕십리

이 영화 <옥희의 영화>는 네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각 장에서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은 각각 (남)진구, (정)옥희, 송 교수(감독)로 반복 출연한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는 영화감독이자 시간강사인 남진구의 하루를 보여준다. ‘키스왕’에서는 영화과 학생 진구와 옥희와 송선생이 주인공이다. ‘폭설 후’에서는 감독이자 시간강사인 송 교수의 수업 시간 풍경이다. 마지막에 배치된 ‘옥희의 영화’는 옥희가 송 교수와 진구, 이렇게 두 사람과 각각 아차산에 갔던 경험의 차이를 놓고 영화로 만들었다.

100자평  홍상수 영화의 구조적 근간이 되는 ‘차이와 반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담백하지만 간단치 않게 보여주는 영화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영화 감독 남진구(이선균)는 고정된 틀 안에 갇힌 영화가 아닌,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양한 국면을 지닌 영화를 지향한다며 이 영화(혹은 홍상수 모든 영화)의 지향점을 적시한다. 이 영화 속 네 편의 에피소드는 미묘한 변주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며 홍상수의 언어가 어떻게 실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은 자신인 동시에 그를 닮은 누군가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소유자들이지만 공통된 기호들의 대체 가능한 담지자들이기도 하다. 감독은 지독하게 반복되면서도 끊임없이 분산되는, 무정형의 삶을 담아내기 위한 ‘인위적인 틀’로서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동일한 극중 이름을 가진 인물, 그렇지만 정확하게 동일자는 아닌 인물을 구성한다. 그리고 ‘옥희의 영화’를 통해 분명히 반복되고 있지만 데칼코마니처럼 일치하지는 않는 삶의 경험들을 나란히 붙인다. 어떤 경험들을 나란히 이어 놓고 보겠다는 그 단순한 생각은 영화의 순수한 기원을 더듬게 하는 동시에, 우연히 이어 붙은 것들을 계열화하여 의미의 ‘깔때기’ 속으로 집어넣고자 하는 욕망의 무의미함을 단박에 깨닫게 한다. -김지미 영화평론가 

절박한 구애란 홍상수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 해야 온당할 것이다. 갈수록 그의 작품은 영화의 존재론적 근원을 탐색하는 ‘구애의 영화’가 되어 가고 있다. <옥희의 영화>는 음악적 구조를 지닌 서로 다른 네 단편의 옴니버스다. ‘...습니다’로 끝나는 고백체 내레이션이 영상에 얹힐 때, 언어는 경관이나 상황과는 어긋나는 미묘한 감성을 전달한다. 이번 영화는 그 애절함의 정서가 남다르다. 감독은 연출의 변으로 ‘겨울에 대한 스케치’를 언급했다. 달리보아 이 영화는 뒷모습에 대한 스케치 혹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의 절대적 고립감에 대한 스케치기도 하다. 우리들의 겨울이 그러할 것이듯, 애잔하고 헐벗은. -송효정 영화평론가 

<옥희의 영화>에 대해 이미 많은 말들이 있다. 정한석은 770호에 긴 글을 실었지만 (프랙탈 구조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관한 나의 글 <나는 환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씨네21> 454호)에서 언급된 바 있고, ‘차이와 반복’ 에 대해서도 이미 여러 평자에 의해 충분히 말해졌음은 물론이고,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아예 대놓고 말하는 것이라서)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옥희의 영화>에서 새롭게 말할 대목은 역시 (문석이 언급한) ‘미니멀리즘’이다. 최소한의 시간, 최소한의 인력으로 건조하면서도 담백하게 자신의 생각과 스타일을 담은 영화를 만드는 것. 홍상수는 영화 찍는 사람들이라면 ‘꿈의 경지’라 불릴 어떤 지점에 도달하였고, 많은 찬양의 말들은 부러움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영화는 <세한도>나 혹은 메밀소바와 같은 간결함 속에, 꾸밈없는 찰라적 사랑의 감흥과 속 깊은 회한을 담고 있다. <첩첩산중>을 포함, 다섯 편의 에피소드들 속 인물들은 동일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사실 홍상수 영화 속 모든 주인공들은 (만화 구영탄 시리즈의 구영탄처럼) 동일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마치 전생이기도 하고, 전생처럼 먼 과거이기도 하고, 나와 닮은 내 친구이기도 하고, 얼굴도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비슷한 누군가이기도 하다. 여기 나의 삶, 너의 삶이 아닌 ‘비 인칭적인 삶(une vie)’이 있다. 홍상수는 이 삶들을 과거에는 캔버스를 접어 대칭으로 찍어내는 데칼코마니 기법을 즐겼다면, 이제는 물위에 유화물감을 풀어 놓고 캔버스에 찍어내는 마블링 기법을 즐긴다. 캔버스, 아니 필름 위에는 물과 기름이라는 물성을 지닌 인물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면서 ‘우연히’ 만들어낸 아름다운 무늬가 찍혀있다. 무심한 데칼코마니를 보고 각자의 심상을 열띠게 토로하는 ‘로르샤흐 검사’에 모두가 동원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한겨울에 옥희의 집 담벼락에서 날밤을 새고, 옥희와 한 이부자리에 든 진구는 얼마나 따뜻했을까를 생각하며,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