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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그들 각자의 영화관
윤성호(영화감독) 2010-10-15

미션: ‘100일을 기다리라는 사랑의 조건’으로 마지막 신 구성해보기

영화 <시네마천국>에 등장하는 ‘공주와 병사’의 예화. 연회에서 만난 공주에게 반한 무명의 병사가 계급의 벽도 잊고 구애를 한다. 그 프러포즈가 싫지 않지만 낮은 신분의 사내를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공주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자신이 사는 성 앞에서 100일 동안 기다린다면 사랑을 받아들이겠노라는 미션. 18개월이나 21개월의 지난한 복무기한을 제시했다면 모를까, 100일이라는 부피는 회피보다는 시험의 용도로 보인다. 당장 접수할 수도 있는 마음을 일부러 지연시키는 이유는, 영토나 작위 대신 다른 기회비용- 가령, 진심, 성실, 한우물- 이라도 지불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보려는 의도랄까. 연애시장에서 우위에 있는 아가씨가 고만고만한 남자에게 통고할 수 있는 “예, 세시에 만나요. 근데 저는 두 시간쯤 늦을 거예요”. 좀 못됐지만 일리가 있는 약속. 어쨌든 병사는 정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성벽 아래에서 5분 대기를 시작해 하루, 열흘, 한달, 두달이 지나고 결국 99일째. 남자의 정성에 기어이 감복한 공주는, 내일이면 성문을 활짝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정작 다음날 아침, 병사는 없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굳이) 남기고서.

끝에 가서야 얄궂은 행보를 보이는 병사의 마음에 대해 토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알프레도도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갈 사람은 가고 어느덧 중년이 된 토토가 그제야 애먼 각성을 토로하길 “병사는 공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두려웠던 거예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감이 더 큰 상처로 남을까 두려웠던 거예요.” 그래요, 그런 거예요, 요약하면 낭만. 사랑을 제 속에서나마 완성시키기 위해서 실제 연애에 대한 청원을 일부러 멈추는 아이러니. 이 쓰레기 같은 세상에, 작고 약하고 예쁜 너와 나 사이에, 무엇보다 완벽하고 진실한 덕목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랑’ 2음절일 것이기에- 여담인데, 같은 질문에 우리 엄마가 머뭇거리다 “바위?”라고 눈치를 보며 답한 적이 있다- 그 사랑의 노정에 예상치 않은 이물질이 끼는 것을 지레 염려하는,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사랑’이 그리 완벽하고 고아한 덕목만은 아님을 스스로 지각하고 있단 뜻이기에 이미 모순 탑재.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모순이라면 일단 중간단계의 합방은 겪어봐도 될 터인데 그 잠깐의 봉우리마저 피하는 것은, 그 모순을 상상 속에서나마 진실된 합으로 완성하려는 몸부림이니까 또 다른 안쓰러운 모순의 발명.

같은 설화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언급된다. 애정의 방향과 기울기는 같지만 신분 차이가 역전된 설정.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100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이를 화두로 질문을 건네는 철학자도 있다.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 신호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서 그는 신호의 약속을 포기했을까? 왜 그는 신호를 이해하거나 혹은 ‘오해’하지 않고, 그 신호를 슬쩍 밀쳐버린 것일까?”-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 마음산책, 2004 그러게, 왜 그럴까? 우리는 왜 경솔히 확신하고 성급히 포기할까? 왜 어떤 약속들은 신호를 필요로 할까, 애초에 신호는 약속일까, 주문일까, 훈육일까? 이 모든 질문에 답하자면 하나의 저작으로도 모자라겠으나, 필자는 시간도 지면도 없는 가련한 영화인일 뿐. 자, 그리하여 이번주 미션. 선비 또는 기녀의 마음과 조건들을 각자 헤아리며 마지막 신을 구성해봅시다. 응원하지도 지지하지도 비난하지도 말고, 그냥 헤아려봅시다. 댓글 달아주세요. 이름도 쓰시고.

히치콕 -안락의자 위에서 미션을 완수할 채비를 한 서생은, 이내 정원의 다른 창문들도 지켜보는 관음 취미에 빠진다. 한 유력가가 다른 기녀를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한 뒤 자신이 범인으로 몰려 100일을 하루 앞두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의자는 맥거핀이다). 다행히 기녀도 사건의 진위를 알게 된 뒤 그의 구명을 돕고 뒤늦게나마 둘은 합체. 단, 이때 얻은 현기증 때문에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선비.

박찬욱-선비가 미션 기간을 자조적인 농담 등으로 소일하며 채우는 동안, 기녀는 창문 안쪽에서 근원적인 죄의식에 빠져 있다. 기녀는 자신의 원죄 때문에 천주에게 일생을 바치기로 한 것. 선비는 징글징글한 열정으로 100일을 채우지만 기녀는 숨을 거두고, 윤리적 당혹감에 빠진 선비를 기다리는 건 신분제 철폐를 외치는 황건적들.

타란티노-선비와 기녀, 그리고 뜰에 잠입한 닌자 등의 시점이 각각의 챕터로 펼쳐진다. 기방 주인이 마침 아라사(지금의 러시아)에서 들여온 전축을 틈틈이 시험하느라 틀어놓은 엔카 및 군가 등이 각 단락 고유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떠난 선비 때문에 기녀는 각혈을 한 뒤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고, 동료 기녀들이 무책임한 선비를 기어이 찾아내 응징하면서 피날레.

김기덕-기녀가 업소 여성이 된 건 실은 과거에 선비가 저지른 성범죄 때문. 그러니까 그의 100일은 참회와 청원의 기간. 그동안 기녀는 강박적일 정도로 다른 남자 손님들을 받는 데 열중하고, 100일째 선비는 종적을 감췄지만 기녀는 그가 ‘여기’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신, 기녀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며 누워 있는 동안 클로즈업되는 정원의 조경은 묘하게 선비를 품고 있는 모성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김현석-99일째, 선비는 최종선택권을 기녀에게 넘긴다. 물리적인 기한을 채워서 얻어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리라. 그래, 할 만큼 한 건 아니지만 할 만큼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일 수 있으니까 할 만큼 한 셈이야. 그녀에게 답을 미루고 애틋하게 자리를 비운 선비. 100일째 다른 철없는 선비가 와서 기녀와 해피엔딩.

홍상수-관직 다툼에 지친 머리를 식히려 마실 나온 선비. 기녀를 보고 반한 뒤 곧바로 천진하게 (그러나 딴에는 선수) 말을 건넨다. “예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저잣거리에서 가장 예쁘십니다.” 결국 100일 미션을 통고받은 뒤 의자를 사러 돌아다니던 선비. 다른 묘령의 여인을 만난 뒤 깜빡 졸다가 기방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좋은 꿈을 꿨으니 하하하.

아핏차퐁-선비는 창문과 멀찍이 떨어진 숲에 의자를 놓고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서 가끔 몇 가지 아포리즘을 중얼거리고, 기녀는 선비의 존재를 잠시 잊는다. 하나 중간에 서구 및 동북아시아 평론가들이 나타나 선비의 숭고함을 읊는 문장 대결을 하고 그 소란스러움에 호기심이 생긴 기녀가 커튼을 열어보면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정원에 깃들어 있는 것. 그리고 타이 대중가요.

영화평론가-‘내 인생의 선비(기녀)’ 1~10위를 뽑은 뒤 (가끔 의자의 순위를 매기는 분도) 그 근거를 운율에 맞춰 서술하느라 애를 쓰다가 이 모든 발화들이 결국 충분한 청중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 그 대안으로 세계 곳곳의 의자를 모아 전시회를 열거나 제3세계 선비를 발굴하는 데 골몰하는 동안 기녀랑 선비는 신화의 반열에 오른다.

윤성호-선비는 이미 50일째에 기녀고 나발이고 관심이 없어졌다. 다만 지금 자리를 뜨려니 내공도 그릇도 안된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트위트라도 하며 99일까지 버틴 뒤 “자,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근데 이 상황이 다음 대선의 풍경과 묘하게 겹칠 것 같지 않아” 하고 옆사람에게 재잘거리며 <슈퍼스타K> 시즌2를 보러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