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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요즘 가끔 머리속에 드는 생각인데말야'] 6시간 마다 트위터에 안부 남겨줘요
오지은(뮤지션) 2011-01-21

먼 길 떠나는 M양에게

당신이 일을 쉬고 한동안 멀리 여행을 떠난다는 말에 이 언니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사실 우리는 쉬고 싶다, 쉬고 싶다, 말은 쉽게 하지만 쉰다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제대로 쉬는 데엔 많은 수고가 든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잘 압니다. 항상 허망하게 사라지는 일요일이 매번 그 사실을 가르쳐주니까요. 당신의 결심 아래 깔려 있는 반짝이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요.

수첩을 들고 날 찾아온 것은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습니다. 맞아요, 내가 바로 여달 오지은 선생. 날 지인으로 둔 이상 루트는 나와 함께 짜야지요. 다행히 당신과 내가 비슷한 인간이어서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한 도시에 오래 있으면서,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새로운 걸 보고 채우는 것보다 나 자신을 비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행.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솔직히 좀 많이 미화하는 거고, 그냥 피곤한 애들이 게으르기까지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마음 가는 사람을 만나면 쭈뼛은 접어두세요

커흠, 여하튼 우리는 순식간에 루트를 짰지요. 루트의 시작은 항공권 검색부터가 아니겠어요? 자리 있고, 싸고, TAX 적고, 그런 비행기가 도착하는 도시가 당신의 첫 도시가 될 것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이것도 나름 낭만이에요. 납득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첫 도시를 결정하고 다음 도시를 결정할 때 이 언니가 묘한 말을 꺼냈죠? “음… 니가 그 다음에 보고 싶은 풍경이 무어니?” 비웃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사실 이건 이 언니가 앨범에 트랙 리스트를 짤 때 쓰는 방법이에요. 이름하여 ‘본능법’. 앨범의 첫곡을 고른 뒤에 ‘이 곡 다음에 듣고 싶은 노래는 무엇인가’ 하고 떠오르는 순서로 트랙을 정하는 굉장히 원시적인 방법이지요. 실망했나요. 여하튼 나는 그렇게 지도를 펼치고 잠들어 있던 당신의 본능을 깨웠습니다. 자! 욕망을 말해! 뭐가 보고 싶은 거야! 어떤 공기 속에 숨을 쉬고 싶은 거야! 뭐든지 이룰 수 있어! 우리는 거침이 없었지요. 이젠 이동수단을 고를 차례. 내가 당신 앞에 펼쳐 보이는 수많은 저가항공 사이트들과 저렴한 기차 티켓에 당신은 눈을 동그랗게 빛냈습니다. 우후훗.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요. 당신이 이동수단에 책정했던 예산을 1/5로 줄여주겠어요. 그나저나 언니가 분량을 채우려고 자랑질을 많이 하고 있네요….

당신은 아가씨여서 매일 밤 호텔에서 잘 거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지요? 그런 당신은 가격을 보고는 쇼크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에겐 유스호스텔이 있잖아요. 좋다고 소문난 호스텔은 웬만한 호텔보다 시설이 낫다고요. 다같이 한방에서 자는 게 찜찜하다고요? 바로 옆에 자는 거 아닌데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외국에서의 고독도 하루이틀이지, 아마 일주일쯤 지나면 맥도널드 점원의 “주문하시겠어요?” 한마디에 사랑을 느끼고, “한국에서 오셨나봐요?” 두 마디에 결혼을 상상하고, 마지막 방긋 웃는 미소에 ‘이 사람과 난 운명인가봐’ 엄청난 착각에 빠져, 마지막으로 햄버거를 받으며 “저기… 끝나고 뭐하세요?” 물어봤다가 향후 몇달간 자다가 하이킥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쪽팔려서요. 호스텔에서 누가 뭘 훔쳐갈 것 같다고요? 글쎄요… 그 방의 가장 가난뱅이는 당신일지도 몰라요. 오호호. 게다가 지금은 비수기, 6인실을 혼자 쓰게 될지도 모르죠. 이런 나의 말을 당신은 곰곰이 듣고 있었더랬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 만난 당신은 나에게 놀라운 리스트를 보여주었습니다. 거의 모든 숙소가 호스텔! 게다가 MIXED DORM! 비바! 이 언니는 박수를 짝짝짝 쳤답니다. 너어무 잘 생각했어요. 호스텔에는 세 종류의 방이 있죠. 남자방, 여자방, 그리고 혼합방. 수많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혼합방. 이 언니의 경험담을 들려줄까요. 옛날 옛날 이 언니가 처음으로 유럽에 갔던 그때, 런던에서 가장 위험하다던 어떤 동네의 호스텔에서, 여자방이 가득 차서 혼합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그날. 열심히 놀다가 밤 늦게 방으로 돌아왔는데, 들어가자마자 시커먼 남자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너희를 기다렸어!” 겁에 질린 친구는 제 뒤로 숨고 전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요. 저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 맥주로 단련된 복부, 침대 옆에 쌓여 있는 앰프와 악기, 아 이분들 헤비메탈 뮤지션들이구나!! 음악이 헤비할수록 마음은 퓨어하다고 친구를 안심시키고 “기다려주신 건 고마우나…” 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헤비메탈 오빠들은 “아, 농담이야. 우리 내일 공연이라서 일찍 자려고. 아하하하 놀라게 해서 미안해” 하며 서둘러 침대로 돌아갔어요. 결국 야식 먹고, 수다떨고, 씻고, 화장실 가느라 불을 켰다 껐다 진상을 부린 것은 우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죄송하네요. 여하튼! 당신이 묵게 될 혼합방에 꽃미남이 있을 것을 바라진 않아도, 좋은 남녀들이 있길 바랄게요. 당신이 다음날 같이 산책다니고 밥 먹을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길 바랄게요. 아, 혹시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도록 해요. 여행에는 현재뿐이니까요. 쭈뼛은 접어두세요.

멋진 원피스와 하이힐도 한개씩 챙기고요

혹시나 위험한 길거리에 가게 된다면 ‘내가 이 스트리트의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어깨에 힘 빡! 주고 다니세요. 혹시 이상한 사람이 길에서 짜증나게 굴면 한국말로 마구 욕을 퍼부어주세요. 그리고 그쪽이 깜짝 놀랐을 때 인상 한번 빡! 쓰고 유유히 걸어나가세요. 마음은 마구 후들거릴지라도요. 식당을 찾을 땐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곳 말고 숙소 리셉션에 있는 사람에게 이 동네에 어디가 맛있는지 물어보세요. 잘 모르겠을 땐 무조건 오늘의 메뉴를 시키세요. 사람이 고플 때는 카페의 카운터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스터와 가벼운 대화를 즐기세요. 커다란 플라스틱 컵을 챙기세요. 시리얼을 담아먹기도 좋고, 짐을 쌀 때 깨지기 쉬운 걸 안에 넣기도 좋아요. 여유가 있다면 텀블러를 챙기는 것도 좋아요. 따뜻한 물은 여기저기서 공짜로 얻을 수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홍차 티백을 넣어 차가운 길거리로 나가면 좀더 마음이 든든하겠죠. 우산은 챙겨가지 마세요. 비가 갑자기 온다면 지금 눈앞의 가장 멋진 사람에게 같이 역까지 가자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세요. 전화기를 빌리고 싶을 때는 지금 당신 눈에 보이는 가장 잘생긴 사람에게 종종종 다가가 전화기를 빌리세요. 거절당하면 어때요. 모두 추억이에요. 편한 옷을 몇개 빼더라도 멋진 원피스와 하이힐은 한개씩 챙기세요. 어떤 운명을 만날지 몰라요. 어떤 멋진 밤을 보내게 될지 몰라요. 결국 그 원피스를 꺼낼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해도, 그 긴장감과 가능성이 좋은 거잖아요?

오지랖은 이쯤 할게요. 이 추위에 먼 길 떠나는 당신에게 따로 해줄 것은 없고…. 아! 지난번 핀란드 북극권 여행 때 입고 한번도 안 입었던 히트텍을 빌려줄게요. 아니, 그냥 가져도 좋아요. 당신은 멋쟁이니까 오리털 파카에 어그부츠 같은 건 신지 않죠? 제가 바로 오리털 파카에 어그부츠를 신는 그 사람입니다만…. 아, 비비크림은 챙겼나요? 꿍쳐둔 샘플을 줄게요. 한장씩 쓰고 버리면 되니까 날이 갈수록 부피가 적아져서 좋아요. 그리고 귀찮겠지만 6시간에 한번씩 잘 있는지 트위터에 남겨줄 수 없어요? 위험한 충고만 잔뜩 한 주제에 말은 안 했지만 걱정이 사그라지질 않네요. 이 이중적인 언니를 안심시켜줘요. 내 오지랖이 전부 쓸모없을 정도의 멋진 여행과 행운, 안전을 기원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강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