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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요즘 가끔 머리속에 드는 생각인데말야'] 덕후의 덕력에서 길어낸 우리 인생사
오지은(뮤지션) 2011-03-11

요괴 죽이는 게임하다 다람쥐 쳇바퀴 인생을 떠올리다

원래 이번주에는 2011년 한국 부동산 시장의 동향, 특히 전세가의 급등이 이 사회와 젊은이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 전망, 고환율과 투자심리, 그에 따른 국내외 주식 전망, 그럼 과연 금값은 언제까지 대세일지, 나아가 이집트와 리비아의 정세까지 다루는 글을 쓰려다가… 이달에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2개나 발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아쉽지만 그 글은 접기로 했다.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H시리즈의 5편과 D시리즈의 4편이 동시에 발매된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 엄청난 일이다. 이 엄청남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마치 올림픽과 월드컵이 같은 해, 같은 달에 열리는 것과 같달까? 4년에 한번씩, 2년 간격으로 열릴 것들이 한날 한시에 열리는 그 엄청남! 스포츠 얘기라서 와닿지 않으려나…. 그럼 만약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어떤 복잡한 사정에 의해 동시 배급되어 개봉관에 같이 걸리게 되었다면 거기서 봉준호 감독의 팬이 느낄 패닉!? 대체 뭘 먼저 보아야 할지, 한편을 보고 소화시키는 동안 다른 한편이 궁금해서 소화불량 걸릴 것 같은 그런 마음과 같은… H게임과 D게임의 동시 발매는 나에게 실로 부담이자 축복이고, 고민이자 행복입니다.

내가 덕후(주1)인가, 덕후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중요치 않다. 덕중지덕(주2)은 스스로의 덕력(주3)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법(어? 이렇게 말하면 내가 덕중지덕이라는 뜻인데!?). 뭐, 인터넷에 직접 공략까지 올리면서 게임하는 분들에 비하면 난 애송이일 것이고 (나만 보는 공략집을 만들기는 함) 남자친구 따라서 마리오 점프 몇번 시켜본 게 전부인 분에 비하면 난 영락없는 십덕후(주4)다. 인생이란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같은 사물도 다르게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지난번 <심즈> 글에 이어서 ‘게임으로 보는 우리네 인생사’ 2탄을 써보기로.

요즘은 <나의 시체를 넘어서 가라>라는 고전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다. 쏟아지는 좀비 시체를 피하고 넘어서 막 전진하는 그런 게임… 이 아니고 굉장히 슬프고 무거운 내용의 RPG(주5)이다. 나쁜 요괴에게 저주를 받아 우리 일족은 단명의 운명을 갖게 되었는데, 어서 힘을 키워 그 요괴를 무찌르고 저주를 풀으려니 그 저주 때문에 일찍 죽는데다가, 심지어 인간과 자손을 만들 수 없는 엎친 데 덮친 상황. 하지만 솟아나올 구멍은 있다고 인간과는 못하지만(?) 신과는 자손을 만들 수 있다! 땡큐! 그리고 수명이 짧은 대신 성장도 빨라서 태어난 지 2개월이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그래서 게임 내내 자손을 만들고, 바삐 키워서 전투하고, 그 아이가 또 신과 자손을 만들고, 그러다 마지막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나의 자손아! 나의 시체를 넘어서 가라!’… 이런 참으로 비장한 게임입니다.

거대한 꼭두각시판이라 해도 A버튼 연타

우리 가문의 적, 이 모든 일의 원흉, 주점동자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우수한 용사가 필요하지만 우리 가문은 실개천이라 용이 갑자기 날 리가 없다. 결국 방법이라곤 요괴를 베어서 점수를 쌓아 그 점수를 신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우리 가문에 좋은 유전자를 넣으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10점짜리 하찮은(?) 신이나 만나다가 겨우 형편이 펴서 얼마 전 처음으로 2만점에 가까운 신과 자손을 만들었다. 아아, 우리 가문은 대체 언제쯤 7만점짜리 신을 만날 수 있을까!!! 꿀꺽.

그런데 잘난 신 만났다고 무조건 잘난 자손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운도 중요하고 우리 애와의 궁합도 중요하다. 서로를 보완해주는 상대가 최고겠지만 그게 어디 쉽나. 적령기일 때 해치워버려야 하는데 모아둔 점수가 별로 없다면 형편따라 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100% 만족하는 혼사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아이를 보내곤 하는데 신이 가끔 헛소리를 해서 사람 뒷목 잡게 하는 경우가 있다. 사정상 어떤 시뻘건 원숭이 할아버지에게 금쪽 같은 딸내미를 보냈더니 그 망할 할배가 킬킬대며 딸에게 ‘아가씨 얼굴 밝히는 타입이구먼~’이라고 해서 기가 막히고 코가 빠질 뻔했고, 어떤 능력치도 좋지 않은 변변찮은 신에게 다른 딸을 보냈더니 ‘지루함을 때우기엔 딱 좋은 상대군’이라고 해서 게임기를 부술 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에서 오직 ‘좀더 나은 신’을 만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우리 자손들 앞에 주점동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 너희는 사실 신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어라, 이놈 보게. 무슨 소리 하는 거람. 우리의 성스러운 행위를 매도하지 마~아! 하다가 잠깐, 그러고보니 우리의 인생은 무엇이더냐. 뼈빠지게 요괴 죽여 번 점수는 고스란히 신에게 바치고, 얻은 것이라곤 소중한 자손인데 그 자손도 뼈빠지게 일해서 다른 신에게 점수를 바칠 뿐이고, 마치 쳇바퀴 같지 않은가. 사회의 거대한 틀 안에서 열심히 위만 보고 일하고 그 대가로 받은 쥐꼬리만한 돈은 고스란히 다른 기업의 상품을 사는 데 들어가고, 발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왠지 제자리인 그런 인생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주점동자를 무찌르겠다는 우리의 의지에 배를 불리고 있는 건 사실 신들뿐이지 않나. 주점동자도 우리도 신이 만든 거대한 꼭두각시판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 모든 건 거대한 쇼이니 춤추는 것을 포기하고 손을 놓아야 할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죽기 전에 모든 자손이 유언을 한마디씩 남기는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낚시의 계절이 곧 오는데… 아쉽구나’라고. 전투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던 인생에서 너는 어느새 낚시를 다녔니. 주점동자의 털끝도 건드려보지 못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너는 낚시도 다니고 나름 인생을 즐겼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결국 나 또한 주점동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 게임을 하던 것이 아니었다. 엔딩을 보는 것은 중요치 않다. 엔딩으로 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게 비록 다람쥐가 돌리는 쳇바퀴 같아도 말이다. 같은 자리에서 동동 발을 구르는 인생이라 해도 싫지만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발을 열심히 구르지 않았나. 그거면 충분하다, 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A버튼을 연타하고 있다. 그나저나 H게임과 D게임을 사기 전에 이 게임 빨리 끝내야 하는데….

주1: 덕후, 특정 취미에 깊게 빠져 있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푸근하게 한국식으로 바꿔 부르는 말인 ‘오덕후’에서 앞의 ‘오’를 뺀 말. 뒤의 ‘후’를 빼고 ‘오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게임 덕후와 아이돌 덕후의 숫자가 많지만 그중 가장 진상은 철덕(철도덕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얘기지만 오지은은 오씨여서 더더욱 오덕후라는 신뢰도는 몹시 낮으나 꽤 웃기기는 한 얘기가 있기도.

주2: 덕중지덕, 덕후 중의 덕후라는 뜻.

주3: 덕력, 덕후의 공력. 덕후로서의 경험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뜻하고 덕후들은 이를 자랑하는 것을 아주 즐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주4: 십덕후. 오덕후를 둘로 곱하여 (5x2) 십덕후. 그 더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앞을 된소리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차마 이 교양있는 지면에서 할 수는 없으니 직접 해보시길 바란다.

주5: RPG, 롤 플레잉 게임의 준말. 크게 미국식 RPG와 일본식 RPG로 나눌 수 있다… 고 생각하지만 더 들어가면 복잡하니 (다른 덕후들의 아는 척을 듣고 싶지 않음) 이쯤에서 설명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