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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요즘 가끔 머리속에 드는 생각인데말야'] 그건 꿈일뿐이고
오지은(뮤지션) 2011-03-25

예민한 뮤지션에 대한 전설을 꿈꾸다 깨우친 것

예민한 뮤지션에 대한 전설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누구는 완벽한 습도가 유지되지 않으면 NG. 먼지가 많아도 NG. 무슨 색 조명 아래에서는 집중이 안돼서 NG. 분위기나게 하는 안개효과도 목이 텁텁해지므로 NG. 관객이랑 눈이 마주치면 음이탈이 일어나기 때문에 NG. 대기실의 도시락이 맛이 없으면 NG. 담배 연기를 맡으면 NG. 대기실에 꿀과 레몬이 없으면 NG. 초정리광천수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NG. 대기실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NG. 리허설 때 노래가 너무 잘돼도 NG(본 무대를 망치게 된다고)…. 이 리스트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것과 직접 목격한 것과 나의 경우와 뻥을 섞은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언혀 예민하지 않다. 나는 공연 전에 대기실에서 멤버들 옷을 스팀다리미로 다려줄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심지어 스팀다리미에는 소금을 약간 넣어야 하기에 세트로 소금까지 챙겨옴). 한약 때문에 못 먹는 닭튀김과 소시지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락이 나와도 ‘허허 그냥 먹지 뭐’ 하고 먹을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 무대에 올라가기 30분 전에 ‘어 나 지금 공연장으로 가는 길인데… 표 어떻게 찾으면 되니?’ 하고 걸려온 지인의 전화에 친절히 답할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 누군가가 ‘근데 오늘 곡 순서가 어떻게 되더라?’ 하고 이미 한참 전에 정한 것을 새삼 내게 물어도 화내지 않고 다시 한번 알려줄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 5분 뒤에 시작인데 대기실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얼굴 바로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기자로 추정) ‘오늘 공연에 대한 각오 한말씀’이라고 해도 웃으면서 답할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 그러다 갑자기 노래를 시작해야 해도 얼추 그럴싸하게 부르는… 듯 보일 정도로 나는 정말이지 예민하지 않다!! 아!! 나도 예민하고 싶다!!

아, 나도 예민하고 싶은데

어쩌다 나는 이 꼴이 되었을까. 나도 ‘시끄럽게 할 거면 모두 이 방에서 나가!’라든지 ‘노래 부르기 전에 말 시키지 마!’라든지 ‘이 멍청이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과 세팅이 다르잖아!’라든지 ‘내가 못 먹는 음식을 가져오면 어쩌자는 거야!’라든지 ‘공짜표로 오는 거라면 공연장 위치쯤은 미리 확인해!’라든지 ‘홍차를 마시면 목이 더 말라온단 말이야! 당장 내 앞에서 치워!’라든지 ‘사양벌꿀 말고 진짜 벌꿀을 가져와!’ 같은 말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담배는 나가서 피워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심지어 말하며 미안함까지 느낀다. 너의 흡연권을 방해해서 미안해… 내 성대가 약해서 미안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성대가 약하지는 않았는데… 라고 말했던 건 바로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일.

누구를 탓하리오. 전부 내 탓이다. 그릇이 작은 사람이 스스로가 그릇 넓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을 때 생기는 모순이다. 까칠하고 이기적인 것! 이라는 말을 당당히 들을 용기가 내게 없는 탓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음악하는 거지, 태도로 음악하는 것 아니다’라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다. 진정한 음악인이라면 환경을 탓하지 않는 법, 언제 어디서든 그냥 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기울여 그대로의 솔직한 음을 내면 된다고, 신선 피스타치오 까먹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대체 어쩌다… 의 자기성찰은 그냥 내가 알아서 시간날 때 하도록 하고, 여기선 그 다음 단계의 얘기를 하자. 신선이 피스타치오를 까먹는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게 아니고, 문제는 위에도 말했듯 나의 그릇이다. 예전에는 젊음이 주는 ‘똘기’로 이런저런 상황을 잘 헤쳐왔던 것 같은데, 21세기 사회가 고도화되고, 그에 따라 내 주변도 고도화되고, 예전처럼 기타 하나 둘러메고 공연장에 지각만 하지 않으면 될 때와 다르게 요즘은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함께하는 사람도 많고, 인사할 사람도 많고, 보러오는 사람도 많고, 또 무대가 커지고 러닝타임이 길어질수록 생각해야 할 짜임새나 효과도 많아지고… 그렇게 예전에 비해 신경써야 할 변수가 훨씬 많이 늘어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태에서나 그냥 부르면 된다’라는 나의 오만함은 납작 하고 짜부라졌다. ‘똘기’도 철없을 때나 부릴 수 있는 것.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나 가능하지 십진법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까탈스런 디바가 되고 싶은데

예전에 선배들의 ‘예민전설’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흥 유난스럽군!’이라고 생각했다(지금은 물론 깊게 반성합니다). 예전 모 밴드의 게스트를 하러 갔을 때 모 멤버분께서 날 보자마자 대뜸 수화를 하셨다. 대충 해석을 해보면 ‘제가 목을 쓰면 안돼서요, 지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런 느낌이었다. 아 이게 전설로만 듣던 ‘이분’의 ‘그것’이구나! 약간 놀랍기도 했고 약간 즐겁기도 했고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마음 한쪽에는 슬며시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는 내가 생각이 짧아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은 노래를 잘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그분이 존경스럽고 부럽다. 나도 그러고 싶다! 까탈스러운 디바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어찌해야 할까. 일단, 공연날 짐을 챙길 때 스팀다리미를 빼놓고 가보자. 아, 하지만 그거 하나 가져가는 게 뭐 별거라고. 직접 다려 입으라고 해볼까? 하지만 요령을 모르면 쉽지 않고 또 위험하기도 하고 또 아는 사람이 하면 금방 하는데. 그건 그렇고 공연 직전에 오는 전화는 어쩌지. 받지 말아볼까?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다 공연장을 못 찾으면 어쩌나. 그 사람은 주말을 완전히 망칠 텐데. 도시락은 어쩐다. 담당자에게 먼저 ‘저… 돼지와 닭과 밀가루를 못 먹는데요’ 하고 말해볼까? 담당자가 ‘그럼 지은씨는 뭘 드실 수 있나요?’라고 되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소고기’인데 어른의 세계에서 단가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나로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저나 가장 중요한 건 이거지. 공연 전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 같이 쓰는 대기실인데 혼자 집중하겠다고 분위기 싸하게 만들 수는 없잖아. 기분이 좋아야 연주도 잘되는 것을.

결론이 났다. 스팀다리미는 그냥 계속 챙겨가고, 옷도 5분밖에 안 걸리는 거 까짓거 그냥 다리고, 전화가 받기 싫으면 전날에 공연장에 온다는 사람들에게 약도를 첨부한 동보문자를 미리 돌리고, 꼭 오라는 뜻 아니니까 부담갖지 말라는 문자 또한 함께 보내며, 맛도 좋고 몸에도 좋으면서 가격도 적당한 도시락을 파는 업체를 미리 찾아서 담당자에게 얘기해두고, 공연 전까지 복도에 있자. 아 왔다갔다 하는 스탭들 불편할 테니 창고에 있을까. 하지만 창고는 추울 텐데, 손난로를 챙겨야 하나. 이러고 있는 나를 짜증스러워 할 스탭들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되니까 그냥 대기실에 있어야겠다. 하지만 가래는 끼면 안되니까 조심스레 담배만 삼가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디바의 꿈이여 안녕.

일러스트레이션 강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