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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있는 듯 없는’ 권력의 시녀

청와대에서 한-미 FTA 이행법안에 서명하는 이명박 대통령, 2011년.

도열한 열다섯 참모를 뒤로한 채, 정중앙에 앉은 일인의 결재권자가 네모지고 견고한 탁자를 바라보며 앉았다. 화면의 좌우 대칭을 맞추려는 촬영자의 위치 조정이 사전에 있었을 것이다. 도열한 열다섯의 무채색 정장과 넥타이의 통일감은 이 순간을 보다 엄숙하게 만든다. 11월29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행한 한-미 FTA 비준안과 이행법안 서명을 기록한 장면은 이렇듯 단조롭다. 하지만 서명자 일인과 도열자 열다섯에 가려, 일부만 노출된 벽면 그림까지 세심히 확인한 사람은 적을 것이다. 사회적 파란을 일으킨 이 서명 행위에 그 그림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다. 무슨 말을 할 이유가 그림엔 없다. 그것은 그림의 용도가 아니므로. 고위 관계자가 속한 시공간에는 그림이 걸리기 마련. 백악관 다이닝룸에 의원들과 미팅하는 미 대통령 오바마의 머리 위로 걸린 링컨 대통령 초상화는 (흑인)노예해방의 주체이자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의 적통을 현직 흑인 대통령이 전승한다는 함의를 포괄할 것이다.

백악관 다이닝룸에서 의회 흑인 이익단체와 미팅 중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2009년.

베이징에서 앤서니 곰리의 작품을 관람 중인 토니 블레어 총리 부부, 2003년.

제3제국 시절, 히틀러의 미적 취향이 말해주듯 전체주의 권력은 도발하는 미학을 경계하고, 고전주의를 선호한다. 예술의 본질을 단정하는 건 어렵지만, 변화를 희구한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진로를 제시하는 전위예술은 관료의 권위와 정반대편에 있다. 쪼그려 앉은 토니 블레어 총리 부부를 소형 군상 설치물이 에워싼 모습은 감상 대상이 감상 주체와 대등한 위치이기 십상인 일반적 장면과 차이가 크다. 저 무렵 켈리 게이트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토니 블레어의 위축된 형편을 조롱하는 것만 같다. 전위는 권위와 부조화한다. 예술이 권력 친화적일 때, 예술의 고전적 정의는 가장 잘 확인된다. 권력 친화적 예술은 작품보다 그것이 놓인 시공간의 품위에 기여하기에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이다. ‘없는 듯 있는’ 무목적성의 합목적성.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화가 보수 권력과 근친했던 과거사는 고위 권력자의 세계를 풀이하는 ‘눈빛만으로 통하는 공감대’와 닮았다. 관료의 시공간에 걸린 그림은 감상 대상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빈 공간(타블라 라사)에 뭔가 채워야 한다고 믿는 관료적 ‘공백 공포’(호러 베큐아이)에 기인해 벽에 걸린다. 도열한 열다섯의 좌우 대칭과 열다섯과 일인 결재권자간의 일치된 교감을 이우환의 균질한 화면은 전혀 흩트리지 않는다. 있는 듯 없다. 점과 선만으로도 그림이 된다는 이우환의 알쏭달쏭한 깨달음은 작품을 감상 대상으로 진지하게 간주하지 않는 관료의 권위적 시공간에 합류할 합목적성을 띤다. 그것은 관념의 무게로만 버텨온 현대미술이 오늘날 생존하는 처세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