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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모럴의 인플레를 헤집다

냉전시대의 피로 묘사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노천수영과 산책, 침대에서 혼자 눈뜨는 아침. 작전이 실패하자 요원 스마일리는 은퇴했다. 영화는 이 진부하고 고독한 현실에서 시작한다. 영국 첩보국은 민활하기보다 부패와 반응지체 속에 침체되어 있다. 아마도 금세기 들어 가장 격조 있는 스타일을 보여주었을 오프닝에서 첩보국의 서류함이 서서히 올라가듯, 리프트가 참을 수 없이 느리게 내려가듯 그렇게. 영화는 존 르 카레의 1974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야기는 원작보다 10년 정도 뒤인 1970년대 중반의 런던을 배경으로 정보국 내 이중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금속 피로’ 속에서 오래 지속된 냉전은 첩보전의 언저리에 모호한 모럴의 인플레를 만들어놓았다. 영화는 이 침전물을 헤집어낸다. 이 침전물들은 노련한 자의 회고록 문체처럼 낡은 질서와 늙은 유럽에 대한 향수 어린 수사적 은폐 속에 쌓여 있다.

긴장, 의심, 공포, 그들은 피로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프랑스 합작의 첩보영화로 <렛미인>의 감독인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전에 보지 못한 스타일의 첩보물로 연출해냈다. 영화의 제목은 영국과 소련이 벌이는 장기판에서 이중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들에게 붙인 닉네임에서 따왔다. 이는 아이들이 숫자를 세며 부르는 영국 동요에서 유래된 것이다. 브리티시 로맨틱코미디로 유명한 워킹 타이틀이 제작사라는 점이 이례적이다. 엘리트 스파이물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영화는 움직임보다 밀도 높은 심리의 흐름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다. 단서를 주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놓아 사전정보가 없는 관객에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두더지(이중간첩), 서커스(첩보국), 컨트롤(영국 첩보국 전직 국장), 칼라(소련 첩보국 국장) 등의 은어가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쉽게 생각해서 첩보국의 전 수장인 ‘컨트롤’이 등장하는 장면이 과거라는 점을 알아두면 이해가 쉽다.

긴장의 연속, 의심의 일상화, 공포의 만성화. 이것이 냉전 질서가 모두에게 만들어낸 피로의 핵심이다. 영화는 바람 없이 탁도 높은 먼지 속에 유폐된 듯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 스파이고, 바로 옆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스파이며, 때로는 내 안에 그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파이다. 이는 냉전의 구성적 요소,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외상적이고 실재적 중핵’이다.

올드유럽의 역사와 전통을 강매하는 방식이, 한편에서 투어리즘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스파이영화다. 냉전은 끝났다. 이후 본 시리즈나 새로운 007 시리즈가 개인의 정체성과 자본의 국경없는 메커니즘을 주제로 삼았으나 이들도 역시 올드유럽의 품격, 저개발국의 엑조틱한 스펙터클, 액션이라는 장르 컨벤션을 보여주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스파이물의 기원, 즉 조로아스터적인 이원 세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무간도> 시리즈가 이에 가까울 것이다)에서 기존의 스파이물과 다른 인상을 준다. 비관적 피로감에 찌든 올드유럽의 도덕적 교착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윤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진지한 스파이물 내지 프로파간다 선전영화와도 다르다. 선악, 서방과 동구권, 푸른색과 붉은색 어떠한 대조를 갖다대도 이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쌍둥이 반영상이다. 영화는 응징도, 발견도, 성장도, 보상도 없는 세계를 구성해내는데,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유럽이 지닌 유일한 미덕이자 매혹일 것이다. 영화는 윤리, 지성, 미학의 혼돈 속에서 각자의 편집증에 빠져들어가는 스파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스마일리와 칼라, 바로크적 데칼코마니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그는 겉으로 보기에 민첩한 요원은 아니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뚱뚱하고 안경 쓴 그는 말끔한 슈트의 플레이보이형 요원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홈스와 같은 거실형 탐정의 전통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스마일리 캐릭터는 소설로도, 그리고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익숙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지닌 사람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심리적 평정, 독문학에 대한 전문가적 관심, 외도와 난교를 일삼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그의 개성의 핵심을 이룬다. 오프닝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한폭의 작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그가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과도 같은데, 그림에는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 추상화를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 역시 설명 가능한 구체성을 띤 것이 아님을, 그것이 마치 불투명하고 왜곡이 심한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스마일리는 독문학을 애호하고, 그와 첩보국 내 맞수인 빌 헤이든은 화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벽면 곳곳에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러한 그림들을 추적해가는 것도 영화를 독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소련 첩보국의 오랜 수장은 ‘칼라’다. 여성형 이름으로 그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연애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하는데, 적성국과의 첩보관계를 은밀한 연애의 관계로 은유하는 것은 원작자인 르 카레의 탁월한 솜씨 덕분이기도 하다. 칼라는 강력하고 교활하며, 당에 광신적인 냉혹한 자로 묘사된다. 그의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1950년대 중반 스마일리는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러시아로 귀국하려던 칼라의 전향을 설득한 적이 있다. 스마일리는 과거에 칼라를 만났던 일을 술회하면서 홀로 그 장면을 마치 모노드라마 연기하듯 재연한다. 스마일리는 칼라와 자신이 닮았으나 그의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평범하고 진부한 스마일리와 신비하고 광신적인 칼라의 조합은 역설적이다. 스마일리가 아내에 대한 충성도를 지키듯이, 칼라는 당에 대한 충성을 지킨다. 스마일리와 칼라는 반영된 짝패다. 칼라는 실재하는가? 칼라로 ‘추정되는’ 인물은 영화에서 얼굴 없는 부분신체로만 등장한다. 원작에서의 묘사가 그러하듯이 마치 신부처럼, 잔혹하고 냉정한 인간의 뒷모습으로. 하지만 혹시 칼라는 영국 정보국이 구성해낸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스마일리가 재연하는 칼라는 실체가 아니라 강력하다고 오인되는 공허는 아니었을까. 냉전은 실체는 확인되지 않으나 반영물을 보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이한 거울놀이를 만들어냈다. 러시아가 영국을 만들고, 적이 나를 만들며, 애국자가 변절자를 반영하고, 평범한 사람이 바로 스파이인 이상한 질서. 다른 한편에는 짐과 빌의 짝패가 있다. 원작에서 빌은 짐에게 ‘제2의 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의 메피스토펠리스가 되겠다고 말한다. 스마일리와 칼라, 짐과 빌은 각각 선과 악을 담당하는 듯 보이지만, 추잡한 방식으로 추잡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닮아가고 더이상 윤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바로크적 데칼코마니를 만들어간다.

원작에서 스마일리가 어렵게 구한 그리멜스하우젠의 초판본은 소설의 시작과 끝부분에 두번 언급되며, 이를 통해 내용이 주인공의 전쟁 편력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영화는 진행되면서 점점 인물의 관계가 정교화되고 복잡해지며 심리는 보다 편집증적이며 기교적이 된다. 그리멜스하우젠의 <짐플리쿠스 짐플리치시무스>와 영화에 언급된 자크 칼로 판화의 배경은 17세기의 30년전쟁이다. 인유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쟁이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폭력이 어떻게 일상화되는지 암시하고 있다. 유럽의 국제관계를 전면적으로 뒤바꾼 30년전쟁은 냉전에 대한 비유가 된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파이의 일이란 체스처럼 추상적인, 일종의 게임과 같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스파이는 도덕적 가치보다 메커니즘쪽에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중한 게임이 매우 정교한 단계에 도달하면 스파이는 본연의 의무를 잊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이 게임의 매너리즘적 단계, 정교화가 그로테스크하고 바로크적으로 변질되어 결국 선의 승리와 악의 발견조차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피로해져버리고 마는 그 단계를 보여준다. 스마일리는 이중간첩을 색출했고 첩보국에 돌아와 승진했으며 아내는 돌아왔다. 그렇다면 스마일리는 승리했는가? 엔딩에서 그의 표정은 모호하다. 첩보국의 각자는 자신의 평범한 자리로 회귀한다. 권총과 수영복, 활극과 치정의 시대는 지나갔다. 모두 쓸쓸히 홀로, 무기력하고 고독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그들은 피로하며 환상은 저 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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