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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과시 없이, 표나지 않게 존재했던 건축가의 초상

카메라의 망설임과 겸손함이 아쉬움으로 남은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건축가>의 초반부에서 건축가 정기용은 부산 공무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안성 면사무소를 지을 때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나고 물어봤는데 나이 든 주민들이 목욕탕이라고 답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성대결절로 많이 상해 있고 보조 마이크를 써야만 청중이 간신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장면은 <말하는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요약한다.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는 모양을 뽑아내는 건축가가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이며 불운하게도 그 자신의 육체는 남들만큼 버텨주지 못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신이 지은 무주 건물들을 답사하던 그는 설계자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주군청에서 태양열 집적판을 설치한 것을 보고 화를 낸다. “이런 게 녹색성장이라고?” 그는 욕지거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가 공들여 만든 운동장 벤치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등나무 덩굴은 태양열 집적판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하는 꼴이 되어 있다.

단정한 연출력으로 보여주는 정기용의 흔적

<말하는 건축가>를 연출한 정재은은 그의 극영화가 그랬듯이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단정한 연출력을 증명한다. 정기용의 건축사무소에서 이뤄낸 작업들을 일별하고 동대문운동장 프로젝트와 같은, 그가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나 참여할 수 없었던 행정부 주도의 도시 재건 프로젝트의 무식함에 대해, 나아가 토목 개발의 압력 속에서 형태 위주인 현대건축 트렌드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기형화된 한국 건축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정기용의 목소리도 들려준다. 후반부에는 오랜 와병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 그 사람, 한 건축가의 장엄한 모습을 지켜본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사는 게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영화의 한 대목에서 말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삶의 기름기를 빼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대로 밀고 나가는 인간의 흔적을 보는 건 숨이 막힐 만큼 흥분된다.

영화의 후반에 일민미술관에서 정기용의 건축세계를 조망하는 전시가 열릴 때 그의 사무소와 집에서 나오는 방대한 자료의 양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한다. 그가 뿌려놓은 흔적은 거대하다. 그는 그걸 다 실행에 옮길 만큼 시간이 많지도, 주변 여건이 받쳐주지도 않았지만, 자기 혼자 감당하려 했다. 미술관 전시에서 승강이 끝에 빠지게 되는, 도시 계획 프로젝트의 전모가 무엇인지 나는 무척 궁금했다. 우리가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에 살면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결핍감, 도대체 삶의 흔적이나 역사성은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게 돈의 논리로만 재단되어 한시적으로 재편된 개발공간을 횡단하며 사는 처지에서 그가 생각한 삶의 공간으로서의 건축이 반영된 도시의 꼴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해내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가 많은 것은, 영화도 그렇지만, 남의 돈을 갖고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정재은은 정기용이 해낸 것도 보여주는데, 후반부에 자신이 설계한 어느 여자 화가의 집을 방문할 때 정기용의 생각을 공간을 통해 이해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드물게 미학화된 카메라의 포즈로 집 곳곳을 보여 줄 때 딸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집주인의 바람대로 겉에서 보면 잘 드러나지 않는데도 안에서 보면 주변과 무리없이 어우러져 함께 존재하는 집의 공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정기용이 전국 곳곳에 지었다는 기적의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예상보단 비교적 덜 소개된다는 느낌이 있지만 도서관에 대한 고정통념을 깨고 아이들이 마음대로 서로 통하면서 책과 더불어 놀 수 있는 자리로서 설계한 의도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다.

지나치게 신중하지 않았더라면

<말하는 건축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할머니들이 정기용이 지은 면사무소 목욕탕에서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할머니들은 누가 이 목욕탕을 지었는지 아느냐는 물음에 모두 모른다고 답한다. 그 장면 다음에 면사무소 앞 계단 근처에 앉아 있는 정기용과 작업을 하다 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산만하게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은 평범한 사람들 곁에서 자기 정체를 굳이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그들과 호흡하는 장인의 삶의 자세를 웅변하는 듯해 흥미로웠다. 그게 연출된 장면이든, 우연히 포착된 것이든, 이 영화가 다루는 인간의 초상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에서, (아마도 영화도 그렇겠지만) 중요한 것은 만든 이의 서명이 아니라 그가 동참해 끌어내었던 삶의 흔적이다. 오늘날 건축은 돈과 권력의 논리에 따른 상품가치와 전시가치에 동원되어 한시적으로 소용된 다음 가차없이 폐기된다. 적어도 아파트에 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방 수십 킬로미터가 다 아파트로 돼 있는 신도시에 사는 내 주변 이웃들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았던 공간이 아니라 한시적으로 도구화된 공간이며 남들에게 과시하면서 상품가치를 높이는 공간이고 쓸모가 다하면 사라지는데 흔적이 남지 않아도 아깝지 않은 공간에 불과하다.

내가 영화를 통해 이해한 바로는, 정기용의 건축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는 영화에서 파리 유학 도중에 흙으로 집을 짓는 건축에 충격과 영감을 받아 전공을 바꿨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1980년대의 기록화면에서 그는 그런 순환적인 자연관에 기초한 건축철학을 열정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것의 완성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있는 모양으로, 정재은이 취재한 건축가들은 만장일치로 정기용의 작업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착상은 좋으나 결과물은 떨어진다는 식의 의견도 있다. 이런 대목에서 정재은의 카메라는 좀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나같은 관객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이나 제도권 건축 주류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내막을 좀더 상세하게 알고 싶었다. 그가 끌어안고 갔을 모순들, 격하게 몸으로 받아내며 살았던 사정들을 좀더 보고 듣고 싶었지만 일정하게 선을 긋고 간다. 대신 정재은은 시정을 덧붙인다. 정기용이 사는 조그만 다세대 주택 빌라의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정기용의 감탄하는 모습과 더불어 그 햇빛의 가닥을 함께 음미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방향에서라면 아쉬운 것은 또 있다. 죽음을 앞둔 정기용이 건축사무소 직원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가 햇살을 음미하며, 따라온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장면이 있다. 최선을 다한 한 건축가의, 위대한 야심을 품었고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건축가의 삶에 대한 이별의식으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지만 정기용으로부터 떨어져 감독이 직접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으로만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아쉬웠다. 한낱 영화 관객일 뿐이지만, 나도 그의 지인들처럼 그의 마지막 모습을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다. 감독의 겸손한 성품 때문에, 일정한 거리감을 지키고 싶어서, 혹은 촬영여건이 되지 않아서, 촬영자이기 전에 지인으로서 그의 마지막 이별의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결정적 장면이 영화에 지나치게 신중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는 허전함이 생겼다.

극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다큐멘터리는 더욱 잔인한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의도하지 않게 주인공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말하는 건축가>를 보면서 한 훌륭한 건축가의 영상 유서로서 손색이 없고 감동적이라는 여운을 느낀다. 동시에 이것이 그의 치열한 내면, 결코 온전히 그의 사상을 받아주지 않았던 이 사회에 대해 그가 느꼈을 격렬한 분노의 이면을 좀더 잡아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이미 이 땅에 남겨놓은 건축의 흔적을 더 세밀하게 카메라로 오래 잡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대상을 겸손하게 지켜보는 다큐멘터리로서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준 최고의 장면이 하나 있다면 앞서 말한 마지막의 이미지다. 촌부들 사이에서 표나지 않게 존재하는 건축가의 초상, 그렇지만 그가 해낸 것으로 많은 이들이 부지불식간에 일상 삶에서 더 나은 것을 누리고 있는 걸 느긋하게 즐기는 장인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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