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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유니폼의 세계관, 세계관의 유니폼

정장이 잘 어울려 슈트의 정석으로 불리는 장동건의 지오다노 광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속 양복 차림 불량배들. 졸업식의 진풍경이 된 교복 훼손. 의원들의 퇴장으로 의원선서가 거부된 유시민 의원의 평상복 등원. 네오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케시의 오프닝 참석 복장.

현시대 정장은 빅토리아기에 완성된 형식을 큰 틀에서 계승 진화시킨 것이다. 기원이 말해주듯 이념적 보수주의가 스민 이 의복은 위계가 요구되는 조직에서 널리 착용되어 정장은 직장의 유니폼인 셈이다. 유니폼은 양면성을 지닌 의상이다. 정중한 형식 속에 구성원을 제어하는 손쉬운 장치를 내용물로 탑재하므로. 외견상 다만 의상을 몸에 걸치는 것일 뿐이지만 옷 속에 갇힌 인체는 각진 옷의 규율에 지배된다. 행동반경과 그 성격도 옷에 의해 검열된다. 예외는 있지만 평상복 차림에서 자연스런 언행도 유니폼 안에선 무례하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까다로운 의상예절로 구성원을 제어하려는 조직은 예외없이 유니폼을 고집한다. 군부대, 학교, 기업체가 대표 격이고 패싸움할 때 추리닝이 훨씬 편할 텐데 조직폭력배마저 한사코 정장 차림으로 싸우려 든다. 동네 양아치와 급이 다르다는 걸 복장으로 웅변하는 거다. 정해진 일과와 주기적인 급여는 정장 차림 직장인이 누리는 구속이자 혜택이다. 반면 안정된 처우를 흔쾌히 포기한 자유직은 유니폼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유독 예술가의 패션이 분방한 까닭은 조직체의 균질한 의상이 유발하는 어지러움에 누구보다 적개심이 강한 무리여서다. 그렇지만 위상이 요구되는 예술의전당 개막식에 참석하는 예술가는 유니폼을 챙기는 일이 많다.

정장이 수세기 쌓은 관록을 향한 공동체의 경외심은 남다르다. 슈트에 어울리는 남녀 연기자가 사진과 함께 호평되는 일도 흔하며, 평상시 운동복 차림에 친숙한 유명 스포츠 스타(안정환, 김연아)의 연출된 정장 변신에 후한 점수가 주어진다. 정장문화가 구축한 빅토리아식 아성은 급진적인 반발부터 절충적 배합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구성원들의 도전을 꾸준히 받아왔다. 유니폼이 감싼 인체 동선은 비효율적이며, 사지를 격식에 예속시키며, 감시에 쉽고 노출되는 시각적 통일성도 착용자의 개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반발의 대표 사례는 졸업식에서 목격되는 학생들의 교복 훼손 세리머니다. 수년간 젊은 육체를 예속시킨 제도 교육의 행패와의 결별을 ‘구속 수단’인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살포하는 걸로 표한다. 졸업식 교복 훼손 문화가 사실상 정착하자, 불안했던 공동체의 보수는 2012년 일선 학교 졸업식장에 ‘탈선 집중 단속’을 명분으로 경찰부대를 파견했다.

공인 가운데에도 유니폼의 정중한 룰을 고의로 그러나 절충적으로 이탈하면서 존재감을 세우는 경우도 보인다. 가수 비와 배우 류승범처럼 정장에 스니커즈를 신고 공식석상에 서는 것. 아주 작은 포인트 변화지만 포토라인에 선 동료 연예인들보다 시선집중의 비교우위를 확보하고 반항아 캐릭터도 얻는다. 하지만 이런 절충적 이탈도 예능계니까 통하는 거다. 괜한 품위나 따지는 정계에서 절충적 이탈을 시도했다간 베타버전도 수용 안된다. 2003년 4월24일 재보궐 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개혁당 유시민 초선의원은 의원선서를 하러 단상에 올라섰지만 선서를 하지 못하고 내려왔다. 면바지에 청색 재킷 차림으로 등원한 그에게 쏟아진 동료 의원들의 야유는 이런 것이었다. “여기 탁구 치러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