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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제3의 성, 희망 대신 위안을

카글라 젠치리치와 기욤 지오바네티의 신작 <누르>

카글라 젠치리치와 기욤 지오바네티의 <누르>.

지난 2009년 12월, 파키스탄 대법원은 여장남자와 거세된 사람들을 하나의 성(性)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반적으로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터부시하는 파키스탄의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등 인도 아대륙 지역의 트랜섹슈얼, 여장남자 등 성적 소수자의 문화와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게 지속되어왔었다. 인도에서 그들은 통칭 ‘히즈라’, ‘코지아’, ‘차카’ 등으로 불리며, 파키스탄에서는 ‘쿠스라’라 불린다. 대개 그들은 가족을 떠나 집단을 이루어 살며, 가정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입양하여 가족을 이루기도 한다(‘히즈라’는 단어의 근원인 아랍어 ‘히즈르’는 ‘무리를 떠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LGBT영화를 이미 70년대부터 만들어왔다. 메흐무드의 1974년작 <결혼하지 않은 아빠>(Kunwaara Baap)를 시작으로 대스타 아미타브 바흐찬 주연, 만모한 데사 이 연출의 <아마르 악바르 안토니>(Amar Akbar Anthony, 1977), 인도의 첫 트랜스젠더 의원인 샤브남 마우시의 삶을 다룬 요게쉬 바라와지의 <샤브남 마우시>(Shabnam Mausi, 2005), 산토시 시반의 <나바라시, 제3의 성>(Nine Emotions)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쿠스라’가 대략 30만명에 달하면서도 이러한 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못했다. 파키스탄이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 국가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글라 젠치리치와 기욤 지오바네티의 신작 <누르>(Noor)는 매우 이례적인 작품이다. 2009년 대법원 판결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시회적인 분위기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트럭 튜닝업체에서 일하는 ‘쿠스라’ 누르가 자신을 겁탈하려 한 트럭운전사를 때려눕힌 뒤, 그의 트럭을 훔쳐 늘 가고 싶었던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의 샨두르 호수를 향하는 로드무비다. 샨두르 호수에 가면 그가 사랑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도중에 그는 춤을 추는 댄서라는 이유로 남편과 아이들과 강제로 헤어지게 된 우즈마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동행하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로의 처지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눈부시게 아름다운 샨두르 호수에서 누르는 우즈마에게 ‘카탁’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실 트럭 튜닝업체에서 일하기 전 누르는 댄서이기도 했다. 샨두르 호수에서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만 우즈마와 함께 춤을 추면서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얻지 못하는 그들을 샨두르 호수는 마치 신의 품처럼 따사롭게, 그리고 위로하듯이 껴안는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간적 위치에 있는 누르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거세되어버린 그에게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했다. 누르가 훔친 트럭은 매우 상징적이다. 일반적으로 장거리 트럭운전사의 이미지는 마초적이지만 파키스탄의 트럭은 좀 특별하다. 이른바 ‘트럭아트’라 불리는 파키스탄의 트럭 치장기술(일종의 튜닝)은 가히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2010년에 트럭아트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가 하면,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트럭아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름답기가 그지없는데, 너무나도 여성적이다. 남성적이면서 또 동시에 여성적인 이 기묘한 양성적 분위기는 누르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최근 이슬람권 국가에서 LGBT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종교의 사회적 지배력이 강한 지역에서 성정체성에 관한 금기가 깨진다는 것은 세대간에 의식 차가 생기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로 영화는 그 최전선에 서 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