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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랑하세요
이효리(가수) 2012-05-18

오늘도 속 없는 김밥을 먹는다. 바쁜 스케줄 사이에 짬을 내어 끼니를 해결할 때, 채식을 하는 내게는 김밥이나 떡볶이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 김밥집에 들를 때면 가장 기본적인 원조김밥을 주문하고는 햄과 달걀, 단무지는 빼달라고 한다. 채식을 하는 터라 햄과 달걀은 빼는 것이고, 짜지 않게 먹으려고 단무지까지 빼달라 한다. 어김없이 김밥집 아주머니의 웃음 섞인 핀잔이 돌아온다. “그러려면 김밥을 왜 먹누?” 설명하기엔 길고 복잡하기에 그냥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지만 당근 몇개만 송송 박힌 김밥을 먹을라치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진정한 육식광이었다. 소, 돼지, 닭, 오리 등등 개고기 빼고는 모든 고기를 다 좋아했다. 머리, 껍데기, 발, 내장 등 부위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그러던 내가 김밥 속 햄 한줄까지 발라내고 있는 걸 깨닫는 순간이면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하나 싶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에 나 자신을 잘 타이른다. TV에 나와 동물 보호를 외치면서 고기를 먹고 가죽옷을 입는 게 영 찜찜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개와 고양이는 가족처럼 대하면서 거대한 공장식 축산업에 학대당하는 동물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고기를 덜 먹는 게 지구환경에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은 공장식 축산업을 통해 기르는 가축의 트림과 방귀다.

그런 고민에 채식을 시작했는데, 웬걸,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고기의 맛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는 아주 힘든 결단이 필요했다. 채식주의자는 콩으로 만든 채식주의자용 고기를 먹는다. 인터넷 채식 사이트에 가면 콩고기, 콩소시지, 콩어묵 등 별의별 걸 다 판다. 고기와 맛이 똑같다길래 콩고기를 샀더니…그냥 콩 맛이었다. 혹시나 싶어 돼지불고기 양념에 볶아서 쌈을 싸 먹고, 양념치킨 양념에 발라서 맥주와 함께 ‘치맥’인 양 먹어보기도 하고, 콩소시지를 부대찌개에 넣어서 먹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려놓고서는 돼지불고기 양념에 콩고기를 볶아먹는 내 모습이 참으로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 세상에 고기를 대체할 식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고, 그 순간부터 콩고기로 고기를 대신하려는 열망도 끊어낼 수 있었다.

채식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밥을 먹을 때마다 “왜 채식을 하는 거야?”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의욕에 차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요즘은 그냥 “속이 안 좋아요”라거나 “콜레스테롤이 너무 높대요”처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답으로 간단히 대꾸할 때가 많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배려가 점점 많아진다. 요즘은 화보를 찍을 때도 채식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국 채식주의자들의 짐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 때문에 나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 좀더 자주 채식을 이야기하고, 실생활에서도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진다.

물론 여전히 그리운 것들이 있다. 아직도 멋진 가죽 재킷은 쿨해 보인다.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구워 먹던 막창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채식은 음식 습관을 넘어서서 처음으로 지켜보고 싶은 나와의 약속이 됐다. 나를 위해, 동물을 위해, (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 채식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채식은 엄격한 규칙이나 딱딱한 철학이 아니다. 채식은 사랑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