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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자의 옷차림

<내 아내의 모든 것>

나는 이상하게도 아내에 관한 영화에 감정이입을 잘한다. 어릴 땐 이상의 <날개>를 읽고서 외출한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물건에서 체취를 더듬는 주인공의 상황을 깊이 동정했고, <토니 타키타니>에서도 쇼핑 중독증에 걸린 아내가 죽고 나서 731벌의 옷을 대신 입어줄 여자를 고용하는 토니 타키타니의 쓸쓸함에 깊이 공감했다. 결코, 아내를 가질 리 없는 여자인 내가 그들의 심경에 마음을 잘 이입하는 건, ‘아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엄마’와 비슷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밥을 챙겨주고, 묵묵히 뒤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결코 나를 미워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언젠가 눈을 떴을 때 소리 없이 떠날지도 모르는 사람. 그리고 일단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

그러한 존재가 정말로 떠나버렸을 때, 우리가 마음을 의지하고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은 아마도 그 사람의 옷장이 아닐까 싶다. 나만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릴 적 나는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면 가장 먼저 엄마의 옷장으로 달려갔다. 상식적으로는 엄마가 옷을 쌌나 안 쌌나를 확인해야 맞겠는데, 난 그저 엄마의 체취가 가장 잘 간직된 그곳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기부터 했다. ‘엄마는 떠났어도, 옷장에 아직 이만큼 옷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만큼이라면 엄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어.’ 물론 엄마는 집을 나갈 의사 따윈 전혀 없었고, 단지 장을 보러 나간 것이었다. 오빠가 군대에 갔을 때, 엄마가 가장 서럽게 울었던 건 오빠가 머리를 깎던 날도 아니고, 훈련소 뒤로 멀어지던 순간도 아니었다. 오빠가 입었던 옷가지들을 싼 소포가 도착했을 때였다.

옷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누군가가 떠나면 빈방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모두 그 주인의 분신이 된다. 쇼윈도에 걸린 옷들은 그저 천 조각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몇번이라도 입고 나면 그것은 일종의 인성을 갖게 된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인성을 갖게 된 옷에 모양이나 상표, 가격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걸 생각하면 옷이 품을 수 있는 것들에 멋이라는 건 얼마나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지.

아, 그나저나 정말 슬픈 일은 아내란 우리의 머리나 감성에서는 이토록 손에 잡히지 않는 애틋한 존재인데, 실제로 많은 남편은 아내가 제발 떠나주길 바란다는 사실이다. 카사노바를 고용해서 아내를 유혹해 제발 자신을 떠나게 해달라는 두현(이선균)은 수많은 남편의 공감을 일으킨다. 임수정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빨간 드레스를 차려입고, 사랑을 쏟아부어도 그녀가 아내라는 이유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은가. 방법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뿐인 모양이다. ‘당신을 흔들림 없이 사랑하지만, 갑자기 떠날 수도 있는 여자의 옷차림과 행동양식’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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