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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저 구닥다리 폭파해버려

<007 스카이폴> 본드의 슈트, 그리고 애스턴마틴

부모의 보호막 없이 세계와 맞대면해야 했던 아이들의 눈에는 묘한 빛이 서려 있게 마련이다. 맹수들이 날뛰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너무 일찍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들여다본 자들. 의자에 묶인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나와 같은 종족임을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 체력 검정과 사격 시험, 정신 감정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요원을 내게 보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었다. 이런 쓰레기로 내 음모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러나 마카오 도박장에서 그가 세버린과 나누는 대화를 감청하다가, 그런 의심이 섣부른 것임을 깨달았다. “공포에 대해 얼마나 알죠?”라는 세버린의 물음에 그는 간단히 답했다. “모조리.”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한껏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가 하루빨리 나를 찾아와주길 고대했다. 그리고 그를 실물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에게 반했다. 단단한 어깨선과 흉곽 근육 덕분에 핸드메이드 슈트는 피부인 양 그의 온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잘 조련된 골격만이 연출할 수 있는 우아하면서도 민첩한 몸동작은 그 슈트에 생기 넘치는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의 자존감을 지켜주었을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긴 시간 동안 육체노동을 행해야 했던 이들이 지닐 법한 둔탁한 얼굴 윤곽선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본드에게서 고전적인 반영웅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바닥의 흔하디흔한 첩보원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부류의 것이었다.

역시 남자를 보는 M의 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우한 운명을 타고난 남성들과 정서적으로 섬세하게 교류하는 법뿐만 아니라, 그들 내면에 축적된 감정적 에너지를 폭력적으로 분출시키는 법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고아 출신 요원들을 선호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본드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M의 의붓아들이었다. 물론 나는 생전 처음 맛본 엄마의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곧바로 폐기처분당했지만 말이다.

사실, 런던의 MI6 지하벙커에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을 때, 현실 속의 그녀가 내 기억 속의 그녀보다 더 작게 쪼그라든 걸 확인하고선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고작 저 조그마한 여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젊음의 열정을 불살랐고,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생의 남은 시간을 소진했던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복수의 화살은 이미 내 손을 떠난 뒤였다.

지금 나는 헬기에 탑승한 채 본드와 M이 은신한 스카이폴 저택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런던 한복판에서 슈트를 잘 차려입은 본드와 멋진 한판 승부를 벌이길 원했었다. 호기심 넘치는 관객도, 익명의 수많은 희생자도 없이 찬바람만 휘몰아치는 스코틀랜드 촌구석이라니. 사실 그 어떤 복수극의 주인공도 자신의 대서사시가 이런 따분한 곳에서 마무리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라, 그런데 거기 저택 앞에 세워진 저 애스턴마틴은 뭐지? 볼펜폭탄 같은 가제트 무기를 들고 설쳐대던 시대를 상징하는 구닥다리. 본드의 슈트와 묘하게 어울리는 믹스앤드매치였다. 일단 착륙하자마자, 저 차부터 박살낸 뒤 쇼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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