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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정체성이라는 문제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3-03-29

마르셀 뒤샹의 경우

마르셀 뒤샹의 여성적 알터 에고(alter ego)는 1920∼21년 사이에 만 레이가 찍은 몇장의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로즈 셀라비’(Rose Se′lavy)일 것이다. 여기에 언어놀이가 숨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이름 속의 ‘R’을 불어 철자의 명칭인 ‘에르’로 읽을 경우, 그 이름은 “사랑, 그것이 곧 삶이다”(Eros, c’est la vie)라는 불어 문장과 발음이 같아진다. 1921년에 뒤샹은 아예 ‘에르’(R)를 첨가하여 그 이름을 ‘Rrose Se′lavy’로 표기하게 된다. 왜 이름에 ‘더블 R’을 사용하려 했을까?

여성-되기

훗날 그는 여자로 분장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술회했다. “사실 나는 내 정체성을 바꾸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유대식 이름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좋아하거나 마음이 끌리는 유대식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예 성을 바꿔보는 게 어떨까?’ 그게 훨씬 더 간편했다. 그리하여 거기서 에로스 셀라비의 이름이 나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체성은, 심지어 성적 정체성마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변경 혹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사실 그가 성적 정체성을 뒤바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그 전해에 뒤샹은 <LHOOQ>(1919)라는 작품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넣은 바 있다. 여기에도 물론 뒤샹 특유의 짓궂은 언어놀이가 사용됐다. <LHOOQ>의 철자를 불어로 발음하면,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Elle a chaud au cul’)라는 음탕한 문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로즈 셀라비가 남성 예술가의 성적 정체성을 여성으로 바꾸어놓는다면, <LHOOQ>는 거꾸로 영원한 여성의 아이콘에 콧수염을 달아 그것의 성적 정체성을 바꾸어놓는다.

그로부터 60년 뒤 앤디 워홀이 뒤샹의 제스처를 반복한다. ‘드랙 퀸’(drag queen)에 관심이 많았던 워홀은 파티에서 여장을 즐겼고, 때로는 파티에서 입을 여성복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워홀의 이상형은 “완전히 여자(girl)이기를 원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남자(boy)”였다. 여장한 앤디 워홀의 모습은 1981년 그의 사진 조수였던 크로스토퍼 마코스가 촬영한 일련의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역할놀이를 통해 인공으로 구축한 성 정체성은 미디어를 통해 구축되는 깊이 없는 표면, 즉 그의 또 다른 페르소나가 된다.

전통적인 성적 분할에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뒤샹과 워홀의 여장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워홀이 그저 여장을 했을 뿐 자신의 정체성을 분할하지 않은 반면, 뒤샹은 로즈 셀라비를 또 다른 자아로, 말하자면 또 다른 주체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뒤샹은 로즈 셀라비를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심지어 몇몇 작품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장한 워홀이 캠프 취향의 표현에 가깝다면, 뒤샹의 로즈 셀라비는 일종의 ‘유사 인격’이 된다.

<벨 앨렌>(1921)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향수병을 이용하여 만든 레디메이드 작품이다. 뒤샹은 기존의 향수병에 레이블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 새로운 레이블에는 만 레이가 찍은 여장 뒤샹의 사진 아래로 ‘벨 앨렌. 오드 비올렛’(Belle Haleine: Eau de Viollete)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로즈 셀라비’의 약자가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중의 ‘R’자가 거울상으로 뒤집혀 있다(‘ЯS’). 이 향수병의 바깥 케이스에 뒤샹은 로즈 셀라비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그가 로즈 셀라비의 이름에 ‘R’을 첨가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향수병에 붙은 사진은 우리가 아는 로즈 셀라비의 모습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로즈 셀라비는-프란스 피카비아의 약혼녀에게 빌려 입은- 두꺼운 모피 코트 속으로 수줍은 듯이 얼굴을 파묻은 부드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향수병에 붙은 사진 속의 뒤샹은 그보다는 인상이 더 매서워, 사진 밖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을 던진다. 일설에 따르면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분장의 놀이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뒤샹은 “벨 그린으로 분장한 벨 앨렌으로 분장한 로즈 셀라비로 분장”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하면, 뒤샹은 1920년 이후 로즈 셀라비라는 여성으로 분장한다. 그 로즈 셀라비가 레디메이드 향수병 위에서는 ‘벨 앨렌’의 역을 했고, 벨 앨렌은 다시 실존인물인 ‘벨 그린’(Belle da Costa Green)을 암시한다는 얘기다. 벨 그린은 은행가 J. P. 모건의 사설도서관장으로, 뒤샹이 뉴욕에 체류하는 데에 재정적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리처드 시어도어 그리너였다. 그녀는 흑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옅은 검은색 피부를 물려받았으나, 그와 결별한 뒤에는 평생 백인으로 행세하려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이름에 ‘다 코스타’라는 라틴계 표현을 첨가한 것도 실은 검은 피부의 원천을 아프리카가 아닌 포르투갈로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흑인으로서 최초의 하버드 졸업자로서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네그로 혈통과 연결되는 것이 싫었던지, 벨 그린 모녀는 아버지의 성에서 ‘r’을 떼어내어 ‘그린’(Greene)으로 개명까지 했다. 여기서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R’이 갖는 각별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사용된 향수병도 원래는 복숭앗빛이었으나, 뒤샹이 그것을 슬쩍 녹색(green)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라 한다.

마르셀 뒤샹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 시기에 뒤샹이 피카비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구절을 볼 수 있다. “당시 문법의 규칙을 원하신다면, 동사가 주어와 자음적으로 일치합니다. 예를 들어 ‘그 흑인이 적의를 품으니, 흑인 여인들은 적의를 품거나 혹은 얇아집니다’.”(le n`e gre aigrit, les ne′gresses s’aigrissent ou maigrissent. 이 문장을 불어로 읽으면, ‘르 네그레그리, 레 네그레세그리스 우 메그리스’로, 주어에 포함된 음소들이 이어지는 동사들 속에서 음향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뒤샹은 피카비아에게 왜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아마도 피카비아에게 ‘벨 앨렌’에 숨은 의미를 해독하는 열쇠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편 리처드 그리너과 헤어진 뒤 벨 그린의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그리너’에서 ‘그린’으로 성을 바꾼다. ‘적의를 품는다’는 이 이별의 상황을, 그리고 ‘얇아진다’는 성에서 ‘r’이 빠짐으로써 이름이 줄어든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고 보면 뒤샹이 향수병의 색깔을 복숭앗빛에서 녹색으로 바꿔놓은 것 역시 벨 그린이 슬쩍 유색인종에서 백인종으로 피부색을 바꾸려 했던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풍자라면, 짓궂음을 넘어 아주 고약한 풍자임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것은 ‘정체성’의 문제다. 뒤샹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려 한다. 벨 그린의 경우 흑인과 백인의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이 혼합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백인의 정체성을 가지려 한다. 언뜻 보면 제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원한다는 의미에서, 두 사람의 욕망은 일치하는 듯하다. 둘은 정체성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로 뒤집혀 있다. 뒤샹이 지배적인 성을 버리고 차별받는 성이 되려 한다면, 그린은 차별받는 인종이 아니라 지배적인 인종이 되려 한다. 뒤샹은 그 고약한 풍자로 이를 지적하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