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2014-02-24

<로렌스 애니웨이>의 ‘로렌스’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의 경우

<로렌스 애니웨이>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백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 (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파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2012)에 수록돼 있는 시 <>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최근에 본 두편의 영화는 정확하게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헌사처럼 보였다.

로렌스, 무엇이건

<로렌스 애니웨이>가 젊은 천재의 작품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이것이 ‘영화’라는 점을 한순간도 잊지 않겠다는 강박증의 산물처럼 보이는 현란한 촬영과 편집, 정지 화면 상태 그대로 갤러리에 전시해도 좋을 것만 같은 이미지들을 창조해내는 회화적 재능, 영화 전체를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음악으로 조율하면서 그 사이에 베토벤의 ‘운명’ 1악장을 이물감 없이 삽입할 줄 아는 음악적 센스 등등. 이 영화에는 자신의 선택에 거리낌이 없고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기운이 배어 있어서, 때로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화면을 보면서도 유치하다고 타박하기보다는 함께 행복해지고 마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 예술가를 평가할 때 그런 기술적인 요소들보다도 언제나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다. (굳이 나누자면 기교의 천재보다 인생의 천재를 숭배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 통찰력을 갖고 있는 예술가만이 진실한 감정을 창조해낸다. 자비에 돌란 감독이 과연 천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공한 작가인 로렌스 알리아(멜빌 푸포)는 35살 생일을 맞아 자신의 오래된 결심을 마침내 이행하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여자로 살겠다는 것. 그의 내적 자아는 여자인데 불행히도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고 말았다는 것. “35년 동안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죄를 지었어.” 이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로렌스의 선언 앞에서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연인 프레드(수잔 클레망)다. 그녀는 결국 로렌스를 응원하기로 결심하고 힘겹게 이를 실천한다. 그러나 로렌스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장에서 해고되었음을 통보받는 자리에서 로렌스는 동료 교사들에게 “Ecce homo”라는 문구를 남긴다. 물론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이 사람이다”라고 지칭하는 대목(요한복음, 19장 5절)을 라틴어로 옮겨놓은 문장이다. 로렌스는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질 길이 박해의 길임을 예감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면 뒤에 로렌스는 술집에서 시비를 건 어느 사내와 난투극을 벌여 피투성이가 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로렌스라면 당신은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정직하게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긴 영화는 로렌스를 사랑하는 일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프레드가 로렌스를 두번 (혹은 세번) 떠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로렌스가 피투성이가 된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프레드는 로렌스를 처음으로 떠난다. 로렌스와 프레드가 토요일 낮 식당에 마주 앉아 있다. 식당의 모든 손님들이 ‘여장남자’ 로렌스를 힐끔거린다. 서빙을 하는 장년의 여성이 로렌스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아무리 봐도 정말 특이하세요. 재미로 그러는 거예요?” 로렌스를 사랑하는 일의 고통을 아슬아슬하게 견뎌온 프레드는 그 폭력적인 타자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더 이상 억제하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가발을 사본 적 있어? 남편이 길을 걷다가 얻어터질까, 그래서 만신창이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해본 적 있어? 내 입장 생각해봤어? 나처럼 살아봤어?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그럴 자격 없으니까. 우리한테 질문하지 마.” 이 일을 계기로 프레드는 자신이 로렌스를 사랑하는 일의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5년 뒤, 이제 로렌스와 프레드에게는 각자의 배우자가 있지만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로렌스의 집요한 노력에 프레드가 충동적으로 응답하면서 두 사람은 재회하고 그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장소 ‘검은 섬’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을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이별한다. 프레드에게 가정이 있고 그녀가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로렌스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런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정작 프레드는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고 그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만나는 장면을 에필로그처럼 보여주지만, 이 장면은, 그 장면의 뒤를 잇는, 십년 전 로렌스와 프레드가 서로를 처음 발견하는 행복한 장면과의 날카로운 대조를 위해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로렌스 애니웨이>에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벅참을 찬미하는 낭만적 열기와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이 다 있다. 그런데 나는 프레드를 중심으로 후자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닌가.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 영화가 비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적인 균형인데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다시 로렌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 프레드가 그토록 사랑했으나 끝까지 사랑하는 데 실패한 로렌스는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내적 존재의 성별이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남자를 성적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하며 그렇게 외모를 꾸미지만 여성적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을 흉내내지는 않는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을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십년 동안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분명히) 게이가 아니고 (아직은)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나는 그/그녀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명명과 분류는 어떤 난처한 불안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마치 통성명을 할 때 상대방이 이름만 말하면 그의 성(姓)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재차 물어보는 것과 유사한 종류의 강박은 아닌가. 이 영화가 로렌스의 성(姓)에 취하는 대범한 태도는 곧 성(性)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로렌스 무엇이건’(Laurence Anyway)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길’(any way)을 택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로렌스는 프레드를 잃은 뒤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녀 로렌스는 행복해 보인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아델의 삶, 3장을 향하여

‘나 자신이 되는’ 일의 매혹과 고통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프랑스판 원제목은 <아델의 삶, 1장과 2장>이지만 이 이야기는 0장부터 시작된다. 0장을 이루는 것은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이 엠마(레아 세이두)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원작만화에는 없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첨가됐는데, 세개의 문학작품을 아델의 현 단계가 어디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참고문헌처럼 삽입한 것도 그 한 사례다.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느의 생애>를 다루는 수업 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시작될 때 교실 어딘가에서 아델은 소설 속의 마리안느처럼 자신의 삶에 어떤 사랑의 영광과 비참이 함께할지를 상상했을 것이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아델의 식욕을 유별나게 강조하여 그것으로 그녀의 결핍과 욕망을 짐작할 수 있게 유도했다.) 그런데 마침 아델에게 한 소년이 나타났으니 그녀는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될 것인데, 아델은 소년과의 데이트가 자신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그 무렵 문학수업 시간에는 하필 <안티고네>를 다루게 되는데 담당교수는 비극이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떤 영원, 보편, 본질에 가닿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아델은 그 순간 자신이 머잖아 안티고네처럼 어떤 비극적 상황에 던져져 고독한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면 그 일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 수업 이후 아델은 동성친구와 충동적으로 키스한다.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이 어떤 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게 되고 또 사랑에 빠지는 일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진지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아델에게 상처를 주고 아델을 이제 막 시작된 자기 발견의 길 입구에서 쓰러뜨린다. 이 상처는 아델이 더 능동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 무익하지 않았다. 아델은 용기를 내 레즈비언 클럽에 가고 거기서 엠마를 만난다. 이제 아델의 삶 0장은 끝났다. 엠마와 함께 1장이 시작될 것이다.

아델과 엠마가 낮에 다시 만나 맨 처음 하는 일은 상징적이다. 엠마는 아델을 ‘그린다’. 엠마의 의도야 어쨌건, 이제 아델은 엠마가 이끄는(그리는)대로 살 것이다. (이 관계는, 아델을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 엠마가 첫 전시회를 하고 아델이 그 그림들을 등지고 떠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끝난다.) 아델의 삶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아델 자신보다 더 빨리 눈치채는 것은 오히려 친구들이다. 친구들의 잔인한 심문을 경험하고 아델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일이 이 세계에서는 죄악으로 간주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그날 오후 문학수업이 다루는 텍스트는 (영화에서 시인과 제목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프랑시스 퐁주의 시 <물>이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돼 있다. “마치 고정관념처럼 물을 지배하는 중력에만 순종하려는 히스테릭한 욕구 때문에 사람들은 물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프랑시스 퐁주, <일요일 또는 예술가>, 박동찬 역, 솔, 1995) 이 수업 시간에 아델은 딴생각을 했지만, 만약 귀 기울여 들었다면, 자신만의 특별한 “중력”에 순응하며 사는 일이 때로는 “미쳤다”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임을 예감했을 것이다.

쥘리 마로의 원작 <파란색은 따뜻하다>(정혜용 역, 미메시스, 2013)는 이야기를 그런 방향으로 더 강하게 몰고 간다. 원작에서 아델은 엠마에게서 버려지기 전에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먼저 버림받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꺾는다. 아델이 엠마라는 중력에만 순응하는 삶에 만족하면 할수록 엠마는 그런 아델을 못견뎌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문화적 계급 격차가 사랑을 어떻게 내부에서 무너뜨리는지를 다루는 파스칼 레네의 소설 <레이스 뜨는 여자>(혹은 클로드 고레타 감독의 <레이스 짜는 여인>)가 선택한 방향으로 간다. 두 사람의 차이가 상호 매혹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일한 차이가 결국 그 관계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 (이를테면 ‘굴’과 ‘스파게티’의 차이 같은 것 말이다.) 고독을 견디지 못한 아델이 직장 동료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으므로 이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좀 심하게 말하면, 엠마는 아델의 그와 같은 실수를 거의 기다려온 것처럼 보인다. 아델을 쫓아낼 때 엠마가 분출하는 통제 불능의 분노는 엠마가 자신의 위선에 느끼는 환멸의 산물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 아델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는 실패했지만 그것은 가치 있는 실패다. 아델은 자신의 특별한 욕망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한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다. 그녀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특별히 위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 대부분과 달리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실패한 그녀를 실패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원작만화는 병에 걸린 아델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영화는 엠마의 전시회장을 나와 어딘가로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가 절망인지 희망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희망이라고 말할 것이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델의 첫사랑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면 절망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델의 고통은 그녀를 달리 살게 할 것이고 더 사랑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그녀 삶의 제3장을 향하여 걸어간다.

정확한 영화란 무엇인가

두 영화의 공통점을 말하기는 쉽다. 성적 소수자가 주인공인 영화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간단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다수적/전체적인 말이 된 것은 아닌지 따져보기도 전에, 소수자라는 말의 ‘용법’이 너무 진부해져서, 이제 그 말은, 로렌스나 아델 같은 아름다운 단독자들의 생명력을 죽여버린다. 소수자, 더 구체적으로는 여장남자니 레즈비언이니 하는 말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짧다는 것인데, 우리가 특정한 존재에게 짧은 이름을 붙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폭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단독자의 진실을 폭력 없이 말하고 싶다면 짧은 말에 기대지 말고 더 길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로렌스는 ‘본래 여자로 태어났으므로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라고, 아델은 ‘여자를 사랑할 때만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여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 이 말들조차도 너무 짧다. 충분히 길게 말하려면 세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두 감독은 세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긴 영화가 윤리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어떤 진실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최소한의 시간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다른 공통점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할 것이 있지만 이제 그것들보다는 두 영화의 차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말해보려고 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본 관객들이 남긴 감상평에는 ‘레즈비언 영화인 줄 알고 거부감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서 좋았다’라는 요지의 말이 자주 나온다. 이 말은 분명하게 불편해서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다.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레즈비언 커플로 사는 일의 특수한 고통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어떤 격차와 그것이 초래하는 보편적 고통에 대해 말한다. 엠마가 아델에게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 말고 네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말할 때, 엠마는 굳이 여자여야 할 필요가 없으며 아델이 느끼는 고통도 레즈비언으로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보편적인 것이 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좋았다’라고 말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이것은 소수적 주체성을 재현하는 서사물이 자주 부딪칠 수 있는 장벽이다. ‘특수’를 고집할 때 ‘보편’을 잃고, ‘보편’을 지향하면 ‘특수’를 잃는다는 것 말이다. 이 런 맥락에서 두 영화의 상대적 차이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두 주인공이 여자와 여자라는 사실, 즉 이 영화가 레즈비언들의 서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잊게 만들면서 '보편성'의 층위로 넘어가지만, <로렌스 애니웨이>는 로렌스와 프레드의 관계가 갖는 '특수성'을 내내 잊지 않으며 이 연인들은 번번이 같은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만다. 요컨대 정확한 사랑을 그리는 정확한 영화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 두 영화가 '보편과 특수'의 층위에서는 의미 있는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 그렇다고 <로렌스 애니웨이>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보다 더 '좋은 영화'라고 판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수성을 고집하는 길이 보편성에 도달하는 길보다 '언제나' 더 올바른 길이라고 단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게 이런 판단과 단언은 아직은 위험해 보인다. 그러니 일단은 이렇게 마무리하자.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영화, 흥미로운 영화, 정의로운 영화 등등이 있고,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정확한 영화다. 그런데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더 정확한 영화'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