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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피카추] 근육을 못 봐서 이런 게 아니야

<300: 제국의 부활>을 보며 영화의 고증에 대해 생각하다

<300: 제국의 부활>

<300>

<300: 제국의 부활>의 주연 설리번 스태플턴은 전편에 나온 배우 제라드 버틀러가 엄청나게 거대해 보였다. 그래서 자기도 커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했는데, 그랬는데…. 감독은 스태플턴에게 살을 빼라고 했다고 한다. 너는 스파르타 사람 아니라고, 아테네 사람이라고.

그랬다. 그것이 내가 숙취로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끌고, 평소라면 옆에서 삼겹살을 구워도 소중한 늦잠과 바꾸지 않을 토요일 대낮에 간신히 일어나 “식스팩, 식스팩, 식스 곱하기 300은 1800, 그러니까 근육이 1800개, 오호호홋”이라고 중얼거리며 극장에 갔다가 망연자실해 울며 돌아와야 했던 이유였다. 하필 거기서 고증이라니. 페르시아 국왕 크세르크세스를 금칠한 대머리로 만들어놓고, 아테네 전사들을 투구는 반드시 챙기되 전쟁터에서 맨몸으로 뛰어다니는, 위험에 처하면 대가리만 모래 속에 처박는다는 타조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고증이라니. 1800개의 근육을 보러 갔다가 대충 100개도 안 되는 근육의 흔적만 찾고 돌아온 그날, 나의 영혼은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었다.

영화에서 고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직은 예송 논쟁과 이기론을 논할 수 있는 따끈따끈한 국사학과 졸업생이었던 시절,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4년제 대학교를 5년 만에 간신히 졸업했지만(그렇다고 공부를 1년 더 한 건 아니었고 졸업시켜줄 때까지 버티면서 등록금만 5년치를 냈다) 배운 풍월은 있어서 고증이 너무 엉망인 게 아니냐고 따졌더니 상대는 영화 가지고 뭘 그렇게 나무라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그게 영화라며 풋내기 기자를 훈계했다.

그렇게 혼나느라 혼이 나갔다가 나중에야 정신을 차린 나는 분했다. 당하지 않겠다고 대학원 다니는 똑똑한 선배(어찌나 똑똑한지 별명이 오 박사. 하지만 그 뒤 10년 동안 박사가 되지 못했지)에게 과외까지 받았는데!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글래디에이터>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조목조목 씹어놓은 <LA타임스> 기사를 보면서도(일단 엄지손가락을 쳐들거나 내려서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하는 풍습은 없었다고) 분개하지 않았던 건 내가 서양사학과가 아닌 국사학과를 다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글래디에이터>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에로비디오의 명가 한시네마의 신조는 ‘말이 되는 시나리오’였다고 한다. 비디오도 그런데 블록버스터에 말이 되는 걸 원하는 것이 <300: 제국의 부활>의 아르테미시아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지나친 걸 요구하는 건가.

그 말이 되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한 적도 있었다. <생활의 발견>을 보면서 책 한권 간신히 들어갈 조그만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전국을 유랑하는 김상경이 속옷은 어떻게 하는지 신경이 쓰여 죽을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저 남자는 2박3일을 팬티 한벌로 버티면서 여자랑 자는 건가! 이런 용서받지 못할 자 같으니라고.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물었더니 그는 말했다. “감독님이 가방에 팬티하고 칫솔 넣어줬어요.” 훌륭하십니다, 감독님. 그럼요, 사람이 배려가 있어야지요.

배려를 논하고 있자니 다시 <300: 제국의 부활>의 울분이 되살아난다. 고증을 하자면 철저해야겠지만 일단 무시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스파르타의 정신… 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게다가 이건 스파르타 아니고 아테네 영화라지만, 어쨌든 <300: 제국의 부활>은 초지일관의 정신이 부족했다. 대충 봐도 군인이 300명은 넘을 것 같은데 제목이 ‘300’인 것도 괜찮고, 부활했다는 제국이 대체 어떤 제국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괜찮다. 그래도 사람이 배려는 있어야지. 아, 그런데, 내가 근육 좀 못 봤다고 이렇게 투덜대는 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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