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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특수효과의 1인자 정도안 스토리 (1)
2002-02-23

만능특효맨 `정가이버` CG로 이긴다

“저러다 다 작살나겠네” 카메라도, 스턴트맨도 폭발지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 일부 제작진들 사이에선 지금이라도 방어벽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왔다. 부산 수영만의 대형세트에서 벌어지는 촬영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 역시 멀찍하게 떨어져 있긴 했지만, “저러다 생사람 잡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 아니냐”고 웅성댔다. 2001년의 어느 새벽, <리베라 메> 촬영현장에서 무덤덤한 건 정도안 기사와 그의 데몰리션 팀원들뿐이었다. “자, 어쨌든 갑시다.” 이어 정도안 기사로부터 준비완료됐다는 언질을 전해받은 감독의 ‘슛’ 지시가 떨어졌고, 동시에 주유소 세트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하지만 화염은 묘하게도, 사방으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직각 모양을 이루며 이내 하늘로 치솟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무 사고 없이 끝난 현장에는 뒤늦게나마 여기저기서 찬탄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부산의 옛 침례병원에서는 모 광고의 촬영이 이뤄졌다. 당시 제작진은 <리베라 메>의 전설을 전해들은지라, 특효팀에게 “그때와 똑같이 해달라”고만 주문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규모는 적었음에도 불구하도 대형 폭발사고가 터졌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들은 “폭약 심고 터트리는데 달리 방도가 있겠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리베라 메>의 촬영현장에서 정도안 기사가 직접 고안한, 파괴력은 강하되 점화성은 약한 특수분말이 사용된 것도, 부분 폭약을 이용한 무형의 3중 차단막이 설치된 것도 몰랐다. 어쨌든 대형사고로 인해, 또 한번 회자된 건 ‘정도안’이라는 이름 석자였다.

고교시절 1년 결석일수 97일, “학교가 싫었다”

수년째 충무로에서 특수효과 부문 ‘1인자’로 꼽히는 정도안. 현재 그가 작업하고 있는 영화만 하더라도 8편이다. <내츄럴시티> <에스터데이> <튜브> <재밌는 영화> 등 큼지막한 영화들로 인해, 그의 한달 스케줄은 월초에 정해진다. 그런데도 그의 핸드폰에 한번 만나자는 메시지를 남기는 제작사들이 많다. 일찌감치 계약을 맺고자 함이다. 현재 충무로가 접선하는 특수효과 업체가 20여개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데몰리션의 독주가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심지어 정두홍 무술감독은 아예 계약할때 제작사쪽에 특수효과를 정도안 기사가 맡지 않으면 못한다고 제작사에 압력을 넣기도 한다. 그의 이유를 들어보자. “액션을 구상하기 전에 먼저 그가 해줄 수 있는 건지, 아닌지부터 먼저 판단한다. 그가 못한다면, 내 액션도 완벽할 수 없다. 내 작업에 있어 최상 조건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그는 나에게 절실한 존재다. 뭣보다 20년 넘는 현장 경험을 통해 상황의 열악함과 상관없이 모두를 충족시켜줄 만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혹자는 정도안 기사가 특수부대 출신(실제로는 향토예비사단 출신이다)이거나 화공학을 전공한(지금도 그는 화약이나 스모그나 제대로 명칭을 아는게 없다) 줄 안다. 그런 그에게는 유별난 유년시절도, 특이한 이력도 없다. 다만 문제아이긴 했다. 이쯤에서 1975년 겨울로 돌아가보자. 그는 당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상태였다. 1년 결석일수 97일이 증명하듯, 비행청소년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자전거 판 돈 5천원을 챙겨서 무단가출한 이유는 “뭘 배우겠다는 것도,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집이 싫었고, 학교가 싫었다”.

그랬으니 경남 함양에서 상경한 뒤 한동안의 서울 생활은, 자신이 봐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운수좋은 날이면 빈집을 발견해서 몸을 뉘이기도 했지만, 당시 그의 주된 거처는 남산의 벤치였다. 한겨울에도 그는 입고 있던 교련복 안에 쓰레기통을 뒤져 모은 신문지를 쑤셔넣은 채 밤을 지새기가 일쑤였다. 돈이 떨어지자 낮에는 피카디리 극장 옆의 구두방에서 근처의 왕궁다방 등을 돌며 ‘찍새’를 하거나, 조각상을 제작하는 공방에서 ‘시다바리’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싫증이 나기도 했고, 좀 정붙일라치면 “어린 놈이 겁대가리 없이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런 그가 특수효과를 맡아 하던 김철석 기사를 만난 것이 그 이듬해였다. 충무로 스탭들이 아침부터 집합장소로 애용하던 근처 다방을 전전하는 그에게 한 친구가 소개해준 충무로에 있던 한 살롱에 웨이터 보조로 취직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 그곳 단골 손님 중 한명이었던 김철석 기사는 “나 따라다니면서 일 좀 할래?”라고 충무로 호반다방 1층에서 ‘스카웃’ 제의를 했다. 그는 따분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고 즉시 따라나섰다. 태권도 영화에 자주 출연했던 바비 김 주연의 액션영화 <사대독자>(1976)가 김철석 기사 아래서 처음 신고식을 치른 작품. 하긴 뭐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당시 그에게 맡겨진 일이라곤 보잘것 없는 것들이었으니. 트램폴린을 조립해서 운반하거나, 누가 부르면 여기저기 연기를 피우거나,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매트리스를 까는 게 전부였다.

“나를 키운건 팔할이 아동영화”

사실 특수효과라고 하는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소품이나 제작부문에서 맡는 일들이었다. 반공을 주제로 한 전쟁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특화되긴 했지만, 그가 입문할 당시만 해도 제작 편수가 크게 줄어 현장에서의 대우는 예전만(물론 그때라고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못했다. 축적된 노하우는 없었고, 군 홍보영화를 맡는 일부 선배들을 제외하곤 폭파를 위한 다이너마이트조차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 역시 1983년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솔은>(1983)에 스탭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폭약 구경을 처음 했다.

청산리 전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는 동원된 군인들을 달래가며, 지원받은 다이너마이트와 흑연과 시멘트를 지고서 3시간은 족히 걸리는 등반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운반은 고생도 아니었다. 산 정상에서 땅을 파서 폭약 성분을 배합하여 묻은 뒤에는 “준비됐다”와 “슛 들어간다”는 총포 사인이 오가는 동안 되도록 멀찍이 피신해야 했던 것. 무전기가 고가 물품이던 시절이라, 현장에서는 어느정도 시간 약속을 하고서 총포 신호나 깃발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폭약이라는 게 실제 엄청난 양을 묻는 식이라, 멀찍이 떨어진 곳이라도 뒤꿈치가 흔들흔들할 정도였다니, 혹시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발생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매번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는 “이건 특수효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굳이 이 일에 ‘스페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도통 이해가 안 갔다.

10년이 지났지만, 그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현장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 무렵, 그는 독립을 결심한다. 물론 주위에서는 그가 나간다고 하자 비난 섞인 뒷말을 무수히 쏟아냈다. 심지어 “오야붕의 물건을 빼돌렸다는 누명까지 썼다”. 하지만 ‘독립’은 그에게 절실한 문제였다. 매달 받는 급여 30만원은 네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이기도 했지만, “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심과 갈증을 언제까지 눌러둘 수만도 없었다.

헌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수중에 변변한 사무실 하나 얻을 목돈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어디 융통할만한 주변 친구도 없었다. 어쩌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부인이 나섰다. 3백만원을 꿔다 주며, 훌훌 털고 서라고 했다. 자신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을 수도 있다며 전셋집을 담보로 맡겼던 것이다. 그걸 받아들고 그는 ‘목숨 걸고’ 일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딱 3년, 그러고도 이 모양이면 때려치고 나와서 신발장사 하겠다고 배수의 진도 쳤다.

하지만 신생팀에게 영화사에서 작업을 내줄 리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붐이 일기 시작하던 어린이용 SF영화로 눈을 돌린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를 시작으로, 그때는 무수히도 많이 찍었다. 길어야 제작기간이 보름이니, 심지어 이곳저곳 촬영장을 오가며 하루 꼬박을 채워가며 9곳의 현장을 돌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무시하는 그곳에서 ‘빛’을 봤다. “어린이용 영화가 지금의 자신을 키웠다”고 그는 지금도 말한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온갖 ‘실험’을 벌일 수 있었다. “애들 상대로 하는 영화다 보니 굳이 사실적으로 재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나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문방구에 쌓여있는 화약만으로 집 한채를 통째로 날릴 수 있는 방법도, 색색 형광등의 똑딱이 점화 스위치를 이용해서 총의 연발식 격발장치를 만들 수 있는 비법도 그때 알았다. 다양한 스파크를 내는 수십가지 응용 방법도 그렇게 체득했다. 온갖 기구와 자재들을 쌓아두느라 어수선한 집 겸용 사무실에서는 연구가 불가능했으니, 위험천만한 이야기지만 현장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실험실이었던 셈이다. 손가락의 화상 자국 또한 ‘채찍’이고 ‘훈장’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때 작업들이 “누군가에게 배우려고 했다면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라며, “다량의 화약을 수입할 수 없는 국내 상황이나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오히려 나를 자극한 것 같다”고 말한다. ▶ 충무로 특수효과의 1인자 정도안 스토리 (1)

▶ 충무로 특수효과의 1인자 정도안 스토리 (2)

▶ 정도안을 당황케 만들었던 장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