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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피해자, 또 다른 가해자가 되다 <방황하는 칼날>

<방황하는 칼날>의 상현(정재영)은 경력이 오래된 공장 노동자다. 일거리가 늘 많아서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몇년 전 아내를 암으로 잃고 중학생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밤 늦게까지 혼자 지내는 딸에게 항상 미안하다. 사건이 있던 날 밤에도 상현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야근을 하고 늦게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집에 있어야 할 딸이 없다. 며칠이 지난 뒤 경찰(이성민)이 딸의 죽음을 알려온다. 딸이 성폭행당한 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인근 미성년 불량배들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망을 좁힌다. 한편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범인이 잡히기를 바라며 경찰서를 배회하던 상현에게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한통의 문자가 날아든다. 범인 중 한명의 집을 찾아간 상현은 거기서 딸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때마침 들어온 범인 중 한명과 마주치고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이제 또 한명의 범인이 남았다. 상현은 그를 쫓아가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가 있다는 대관령의 한 펜션으로 향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찰들도 급히 그를 쫓는다.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의 유명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등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서 영화로 먼저 만들어진 뒤에 한국에서도 만들어지는 수순을 밟게 됐다. 주요 줄거리는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한국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캐릭터의 구축 그리고 몇개의 정황 면에서 다소 수정을 거쳤다. 우선 주인공 상현의 경제적 상황을 좀더 하층민적으로 그려낸다. 상현이 겪는 불행한 가족사와 그의 힘든 경제생활 사이에 관련이 깊다고 전제함으로써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객의 좀 더 절절한 정서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한편 일본영화와는 다르게 경찰들의 역할이 좀더 중요해진다. 주인공 상현의 1인극이 아닌 경찰과 합을 주고받아 생기는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정서와 템포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쪽을 택하고 그 결과 좀더 어둡고 빠른 버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바뀌지 않고 유효하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용서받는 건 과연 옳은 일인가. 선량한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면 그에 대한 죄는 얼마나 물어야 하는가. 때때로 영화 속 경찰들이 그 도덕적 딜레마를 진부한 대사로 직접 풀어내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영화는 오히려 질문의 긴장감을 잃는 단점이 있다. 그보다는 세심하고 박진감 있는 촬영술, 정재영과 이성민이라는 믿을 만한 배우들의 연기력, 그것들을 적절하게 조합한 감독의 전반적인 연출력이 그 질문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 영화의 장점들이다. ‘도덕적 딜레마는 더 완고하게, 영화적 세기는 더 강력하게’, 이것이 이 영화의 슬로건이었다면 얼마간은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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