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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의 두줄 타기] <아메리칸 허슬>

Q. <아메리칸 허슬>이 번역 경력 중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란 소릴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 ID 아메리칸허참

A. 번역 작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작품은 대사가 빠르고, 러닝타임이 길고, 문화색이 강한 작품인데 <아메리칸 허슬>은 이 세 요소를 다 갖춘 작품이야. 게다가 거의 연기 배틀을 벌이는 작품이라 애드리브가 많아서 대본이 큰 도움이 안 되고, 서로 말을 잘라먹는 장면이 많아서 관객이 빠른 자막을 쫓아오도록 대사를 평소보다 더 함축하는 게 힘들더라고. 진짜 브래들리 쿠퍼의 혀를 뽑아서 채를 썰고 싶었어. 거기에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잖아. 이 양반은 미국식 유머를 굉장히 많이 쓰고 작품마다 미는 표현이 있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crazy’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됐듯이 <아메리칸 허슬>에선 진짜(real)와 가짜(fake)란 단어가 작품 내내 반복돼. 이렇게 연출자의 의도가 분명한 부분은 살려주는 게 번역자의 의무라고 보거든. 예를 들어 crazy는 미친, 돈, 실성한, 맛이 간 등으로 쓸 수 있지만 감독이 의도한 반복 표현이라면 어휘를 하나로 통일해서 써주는 게 좋다고 봐. 마찬가지로 real과 fake도 ‘진짜와 가짜’로 통일해주는 게 좋고. 감독은 관객이 이 표현을 작품 내내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주길 바라거든. 이러면 번역 작가는 선택지가 좁아지고 계산할 것도 많아져.

Q. “발끝 휘날리게”(from the feet up)란 대사가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이야? 그리고 왜 발이 아니라 발끝이야? ID 무좀박멸

A. 어빙(크리스천 베일)의 입버릇인데 딱히 영어에서도 따로 쓰는 표현은 아니라서 말을 만들어냈어. 어빙의 말에 따르면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정도의 뜻이 되는데 한국어 속어 중에 “기깔나게, 아싸리하게” 쯤이면 어감이 맞을 거야. 그런데 굳이 대사에 feet을 살려놓은 건 작품 엔딩 신에 나오는 대사 때문이야. 사기꾼에서 은퇴한 어빙의 독백 중에 “그렇게 오래 자신을 속였으면 발끝을 땅에 붙이고 살 때도 됐잖아”(You can fool yourself for just so long. Then your next reinvention better have your damn feet on the ground), 이런 대사가 있어. 이 악마 같은 감독이 이 대사 하나를 위해 작품 내내 “feet up”이란 약을 쳤다는 거지. 사기를 칠 땐 “발끝 휘날리게”(feet up), 손 씻고 정착할 땐 “발끝을 땅에 붙이고”(feet on the ground). 이 대사 때문에 운을 맞추느라 feet을 살려놔야 했어. “휘날리게”는 “땅에 붙이고”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쓰려고 고른 말이고. 그리고 “발 휘날리며”보다 “발끝 휘날리며”가 있어 보이지 않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나온 최민식 형님 대사 같고. 헤어스타일까지 비슷해서 보자마자 연상되던데. “발끝 휘날리며”가 쏴라 있어 보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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