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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더 날것 같은, 그러면서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역린> 이재규 감독

<역린>의 이재규 감독은 유명 드라마 <다모>(2003)와 <베토벤 바이러스>(2008)를 연출했다. 사극이지만 현대적인 감성을 갖춘 <다모>, 강마에라는 괴팍해서 매력적인 지휘자가 주인공인 <베토벤 바이러스>,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서는 드물게 강력한 팬덤을 형성해냈고, ‘다모폐인’이라는 말이, 강마에를 흉내내는 우스개가 유행했을 정도다. <역린>은 이재규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조선의 제22대 임금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 1년 즈음, 그를 암살하려는 무리와 정조 사이에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가 내용의 중심이다. 사극인 데다 배역까지 많은 영화여서 데뷔감독이 신경 써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연배우 현빈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현장 조율 능력을 손꼽으며 이재규 감독을 “착한 여우”라고 불렀다. 아마 선하게 그리고 영민하게 조율했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착한 여우’를 만나 그의 속내도 직접 듣고 싶었다.

-영화 연출을 맡게 된 계기는. =영상매체에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세아극장에서 <구니스>를 본 순간이다. 일주일 동안 심장이 뛰더라. 영화라는 게 사람에게 이런 것일 수 있구나 싶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됐고 대학도 연관 학과를 갔지만 영화 현장에 바로 나가는 건 좀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좀 비슷해 보이는 방송사를 택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서너편 만들다보니 영화에 대한 열망이 다시 생겨나더라. 몇년 전부터 사람들을 만났고, <역린>의 제작자 최낙권 대표하고는 원작이 있는 영화 하나를 의논 중이었다. 예산이 큰 영화라 바로 하는 건 어려운 때였는데, 그러다 지난해 봄쯤 <역린> 시놉시스를 보게 된 거다.

-드라마 <다모>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겠지만 영화로는 처음부터 사극을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사극으로 데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극은 나이가 더 들고 다른 관점이 생기면 그때쯤 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하게 된 거다. <다모>를 하면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진하기도 했고. 그런데 <역린> 시나리오를 보고 결심이 바뀌었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버디 무비(두 남성주인공이 우정을 나누는 영화) 성향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런 점들이 시나리오에 녹아 있었다. 특히 정조(현빈)와 그가 아끼는 내관인 상책(정재영)의 관계. 정적이면서도 힘과 속도가 느껴지는 전반적인 균형감이 좋아 보였다. 최성현 시나리오작가가 만화 스토리를 하신 분이라 그런지 글을 읽는 순간 영상이 눈앞에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표면 위로 보이는 이야기와 그 아래로 흐르는 이야기가 함께 있는 것도 좋았다.

-정조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정조는 개혁군주와 성군으로 유명하지만 실상 겉으로 드러나는 카리스마를 앞세운 왕이라기보다는 속으로 많은 것을 떠안고 버티며 살아간 왕인 것 같다. 보통 사람 같으면 훨씬 더 일찍 무너졌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힘을 지닌 철인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사람이 고통을 이겨낸 철인이구나 하고 관객이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중심으로 하되 그 사이에 수년 전 과거의 일들을 삽입하는 이야기 구조다. =집중적인 긴장감과 전반적인 비극성을 고려한 결과다. 오래전 과거의 일들을 삽입하는 것이 영화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는 것이라 조심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물의 감정 폭을 넓히고 입체감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익히 알려진 비운의 가족사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했다. =관객이 비워둔 그 행간을 상상하면서 더 깊은 해석이나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너무 불친절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해석의 여지를 더 주고 싶었다.

-정조를 다룬 드라마가 있고, 왕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도 많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게 되지는 않던가. =크게 의식한 것 같진 않다. <역린>만의 왕이나 <역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는 강박이 강했던 것 같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바람직한 군주상이 등장한다. 서민을 생각하는 애민 정신이 쉬우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반면에 <역린>은 복잡한 ‘사람 정조’에 초점을 많이 맞췄다. 누구보다 너그러운 왕이었지만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그런 그를 만든 상황을 보여주고 그가 그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각성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혹은 그런 사람으로서의 정조, 그를 연기하는 배우로 현빈을 택했다. =정조라는 사람은 여성적인 감수성과 남성적인 폭발력을 같이 지녔던 사람인 것 같다. 굉장히 자상해서 눈물도 많았지만 상대를 압도할 때에는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이곤 했다. 부드러운 내면을 지녔으나 그 부드러움으로 무서워질 줄도 알았던 인물이라고 한다. 어딘지 현빈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현빈이 너무 잘생겼다는 것만 빼고. (웃음)

-사료 조사를 꼼꼼히 하는 편인가. =많이 하는 편인데 읽고 나서는 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한지민은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연인 격으로 등장했지만 <역린>에서는 정순왕후라는 정조의 정적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와 대비되는 효과를 바랐던 건가. =그걸 고려하진 않았다. 그보다 정순왕후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인 싸움에 늘 놓여 있었으니 신하들을 단숨에 휘어잡았을 만큼 영악하게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봤다. 가령 이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인물 강마에를 김명민이라는 성실한 이미지의 배우가 했을 때 그 실제 사람과 배역간의 충돌 효과를 바랐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한지민이 그동안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역할을 할 때의 강렬함 같은 걸 바랐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손을 잡고 협박하듯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의 강한 인상은 대사의 살기 어린 뉘앙스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전반적으로 <역린>의 대사들은 우회적이면서도 함축적이다. =그렇다. 그리고 대사의 우회성이나 함축성과 더불어 이미지에서도 그런 걸 여러 방면으로 추구했다. 빛의 상태나 인물의 배치 등이 합쳐져서 관객의 정서에 일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정조가 정순왕후를 만나러 왕대비전에 갔을 때 정조를 쳐다보는 상궁들의 싸늘한 시선으로 그의 흔들리는 입지를 드러내려고도 했다.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삼베옷 안에 빨간 속치마를 입고 있는 정순왕후를 통해 그녀의 욕구를 드러내기도 했다.

-정조의 내관으로 일하는 상책은 온전히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일 테지만,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물론 그는 허구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인물을 만드는 과정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암살 위협 때문에 자신의 침소에서 잠을 편히 자지 못하고 조그만 서고 존현각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존현각에서도 대부분의 나인들을 다 내치고 극소수만 곁에 두어 본인 수발을 들게 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원래는 왕의 방을 내관들이 둘러싸고 보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조의 경우에 유독 믿는 한 사람만 옆에 두었다면, 그리고 그게 바로 상책이라는 인물이면 어땠을까 상상한 거다.

-<역린>을 캐릭터 중심의 영화라고 말해도 되나. =(잠시 생각) 캐릭터가 중심이라기보다는 캐릭터의 ‘관계’가 중심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자세히 보면 인물들간에 2자관계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그 크고 작은 2자관계가 서로 부딪쳐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후반부에는 액션 장면이 등장한다. 그 장면을 찍을 때는 어떤 설계를 갖고 있었나. =만약 한강 다리 위에서 기차가 떨어진다고 하면 그 안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일 거다. 하지만 그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냥 풍광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다. 완전히 객관화된 풍경처럼. 우리가 원래 계획한 건 그 기차 안에 있는 상황처럼 보일 수 있도록 거칠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리듬을 고려해 편집을 하다보니 애초 거칠게 현실 싸움처럼 찍으려던 것에서 약간 달라졌다.

-소도구 및 의상의 복식 등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물론 최대한 사실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겪어보지도 않은 그때를 그 누가 알까. 역사적 고증과 캐릭터의 표현 사이에는 덧칠이 있어야 한다. 영화 속 정조의 용포가 그 예다. 영화는 상을 당한 지 1년쯤 지난 시점인데, 아무래도 정조가 붉은 용포를 바로 입었을 것 같지는 않더라. 하지만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을 만한 의복을 입고 싶어 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고증으로는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상팀과 상의해서 잔주름이 많이 잡혀 있는, 현대적인 느낌이 가미된, 흰색 용포를 창조했다. 그것으로 왕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다.

-균형감이 좋다는 게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런데 균형감을 중시하다보니 오히려 좀 심심해졌다는 인상도 있다. 이건 단점이다. =동의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한 캐릭터를 따라가기보다는 캐릭터들이 서로 부딪쳐서 완성되는 이야기이다보니 병렬식의 관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병렬관계로 큰 틀의 감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영화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심심하다거나 밋밋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볼수록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드라마를 압축한 것 같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만약 내 전작이 영화 서너편이었다면 그런 말은 안 나왔을 것 같다. 이전에 내가 한 것이 드라마다보니 그런 식의 표현이 나온 게 아닐까.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드라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서로의 운명이 부딪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변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인 건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 자체가 드라마적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첫 영화를 연출한 지금 시점에서 어떤 생각이 마음에 남아 있나. =다음에 영화를 할 때는 더 날것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 그러면서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동안 내가 누르고 참았던 창작에의 두려움이나 스트레스를 <역린>으로 다소 해소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적잖이 이 영화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후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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