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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뮤지컬 같은 삶, 삶 같은 뮤지컬

주디 갈런드 Judy Garland

<스타 탄생>

주디 갈런드는 뮤지컬을 위해 태어난 배우 같다. 뮤지컬 스타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목인 춤과 노래 두 종목 모두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서다. 할리우드에서 뮤지컬이 장르로 발전할 때, 다른 뮤지컬 스타들은 대개 춤 하나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를테면 진저 로저스, 시드 채리스 등이 그렇다. 그런데 갈런드는 춤도 잘 췄고, 특히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뮤지컬의 보석이자 할리우드영화의 보석으로 남아 있는 <오즈의 마법사>(1939)가 발표될 때, 갈런드는 불과 17살이었는데, 이런 행운이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춤과 노래에서 숨길 수 없는 재능을 드러냈다. 그때부터 갈런드의 실제 삶은 뮤지컬을 닮아갔고, 뮤지컬 경력의 끝은 결국 자신의 삶을 뮤지컬에 반영한 것이었다. <스타 탄생>(1954)을 통해서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노란 벽돌 길’을 걷던 소녀

<오즈의 마법사>는 판타지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도로시(주디 갈런드)라는 소녀가 애견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서다 폭풍을 맞아 정신을 잃었는데, 그때 소녀는 길고 긴 꿈을 꾼다. 영화의 대부분은 결국 이 소녀의 판타지인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처럼 순수한 소녀가 비현실적인 공간(‘에메랄드시티’)에 가서 소원 성취의 모험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그 판타지의 세상으로 가는 길목이 ‘노란 벽돌 길’(Yellow Brick Road)이다. ‘노란색’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될 색깔인데, 이를테면 순수한 환상에 대한 신호 같은 것이다. 노란 길을 따라가면 꿈이 이뤄지는 환상의 세계를 만날 것 같은 두근거림이 <오즈의 마법사>의 큰 매력이다. 그 길 위를 춤추고 노래하며 걸어가는 도로시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주디 갈런드의 영원한 스타 이미지가 됐다(엘튼 존의 싱글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는 이 영화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사실 갈런드는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이미 순수한 소녀 역을 하기에는 성숙한 외모를 갖췄다. 그러나 스튜디오쪽은 여전히 갈런드의 소녀 이미지가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갈런드는 미키 루니와 짝을 이뤄 십대 커플로 명성을 쌓았는데, 스튜디오는 그 대중성을 계속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지독한 다이어트를 강요했고, 몸을 조여 매는 코르셋으로 나이보다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소녀였던 갈런드를 처녀로 탈바꿈한 데는 뮤지컬 장르의 거장인 빈센트 미넬리와의 만남이 전환점이 됐다. 갈런드는 1944년 미넬리 감독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를 통해 비로소 성인배우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환상의 나라의 소녀 혹은 시골의 이웃집 소녀 같은 이미지의 갈런드는 이제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성숙한 여성으로 변했다. 미넬리와 갈런드는 이 영화를 찍으며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이들 부부의 딸이 뮤지컬 배우인 라이자 미넬리이다). 최고의 뮤지컬 감독과 최고의 뮤지컬 배우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빛나는 미래를 약속할 것만 같았다. 미넬리에겐 그랬지만, 불행하게도 갈런드에겐 그렇지 못했다.

갈런드의 자전적 뮤지컬 <스타 탄생>

주디 갈런드는 연예인 부부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춤과 노래를 배웠고, 언니들과 팀을 이뤄 일찌감치 무대에 섰다. 어린 소녀의 노래와 춤 솜씨는 소문이 났고, 당시 MGM의 사장이자 할리우드의 거물인 루이스 메이어의 눈에 띄어 십대 초반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MGM은 뮤지컬 장르에 특화된 스튜디오였는데, 당대 최고의 뮤지컬 감독이던 버스비 버클리는 어린 소녀를 배우로 거듭 성장시켰다. 배우가 되고 싶은 소녀라면 누구나 꿈꾸는 조건 속에서 갈런드는 생활했는데, 문제는 ‘과로’였다. 촬영현장에서의 불규칙적인 작업 조건 때문에 소녀 갈런드는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를 먹었고, 또 밤샘 작업을 위해 각성제를 먹었다. 일은 몰려왔고, 갈런드는 매일 약을 달고 살았다. 미넬리와 결혼할 때는 약물과용뿐 아니라 술 때문에도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현장에 늦게 나오는 일이 반복됐고, 이미 약 혹은 술 때문에 정신을 잃은 상태로 오는 일도 잦았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가 참 신기한 게, 그런 와중에도 걸작들은 계속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갈런드는 미넬리 감독의 <해적>(1948)에선 처녀를 뛰어넘어 요부에 가까운 성적 매력을 뽐내기도 했다. 진 켈리와 짝을 이뤄 힘찬 동작의 춤을 출 때는 이들이 1930년대의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처럼 194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컬 커플이 될 것만 같았다. 만약 갈런드가 술과 약에서 조금만 멀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진 켈리의 자유분방하고, 힘차고, 열정적인 남자의 파트너로선 갈런드만 한 배우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스테어-로저스 커플’과 ‘켈리-갈런드 커플’은 1930/1940년대, 귀족적/서민적, 우아함/자유로움, 유럽적/미국적 등의 특징으로 끝없이 비교되며 뮤지컬 장르를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을 테다.

갈런드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공연한 <부활절 행진>(1948)을 마지막으로 배우 생활을 끝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더욱더 알코올에 의존했고, 두번 자살을 시도했고, 요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자 영화사들은 더이상 갈런드와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남들은 데뷔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에 이미 정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때쯤 미넬리와 이혼한다. 불과 29살이었다.

갈런드의 이런 굴곡진 삶을 모티브로 삼은 뮤지컬이 그녀의 마지막 히트작인 조지 쿠커 감독의 <스타 탄생>이다. 무명의 가수 지망생이 남자 스타의 도움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반면 남자는 추락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다 알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메이슨이 연기한 추락하는 남자 스타는 사실 갈런드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는 한때 날렸지만 지금은 술에 절어 촬영을 펑크내고, 그래서 결국 할리우드로부터 버림받는 남자인데, 갈런드의 삶이 바로 그랬다. <스타 탄생>에는 결국 두 가지의 갈런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셈이다. 갈런드가 연기하는 스타로의 출세는 바로 자신의 어릴 적 성장기이고, 메이슨이 연기하는 스타의 추락은 불과 몇년 전에 겪었던 자신의 쇠퇴기이다. 말하자면 <스타 탄생>은 갈런드 자신의 두 가지 정체성을 두 배우에게 투사한 자전적인 작품이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운명적으로 뮤지컬계의 스타가 된 뒤, 갈런드의 삶 자체가 뮤지컬처럼 진행됐다. 말하자면 신데렐라의 해피엔딩이었다. 동시에 그런 화려한 영화적 경력은 현실의 삶을 갉아먹기도 했다. <스타 탄생>은 바로 그 성공과 추락의 자서전이다. 천재들이 종종 그렇듯 ‘너무 빠른 삶’을 산 갈런드는 결국 자신의 인생 전체를 뮤지컬로 통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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