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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세상의 이명(耳鳴)을 찾아서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4-12-22

6집 ≪겨울, 그리고 봄≫ 발표한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스캣의 여왕.’ 한국 재즈 마니아들 사이에서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는 그렇게 통한다. 목소리로 즉흥연주를 하는 스캣에 있어서 그녀는 단연 독보적이다. 음색은 또 어떤가. 여러 겹 포개진 결들 사이사이를 오가며 단련된 그녀의 탁성은 부드럽게 이어가는 음이 아니라 굽이굽이 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그게 더 깊은 비감을 자아낸다. 지난달 발매한 6집 ≪겨울, 그리고 봄≫은 그런 말로의 목소리를 더없이 잘 살려낸 멜로디의 모음이다. 무려 7년간 공을 들인 앨범이기도 하다. 그사이 말로는 재즈곡에 맞는 한국어 가사란 무엇인가를 놓고 고심했고 보다 묵직한 이야기로 시선을 돌렸다. 아홉살 아들을 둔 엄마로서 세월호 사고를 지켜보며 느낀 괴로움을 곡으로 만든 것도 그래서다.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에 음악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직접 찾아가 합창부를 만들 정도의 행동파 뮤지션이기도 하다. 음악이, 재즈가 없는 세상은 말로의 세계가 아니므로 그녀의 노래는 끝이 없다. 계속되는 말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다.

-창작앨범 ≪겨울, 그리고 봄≫이 나오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곡 쓰는 일로 7년을 보냈다. 머릿속이 온통 ‘곡 써야 하는데’로 가득 찼다. 낮에는 육아와 집안일을 했고 조용한 새벽이 돼야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곡을 써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잠도 잘 못 자고, 잠을 잤다 하면 작업 시간을 놓친 것 같아 속상해하기의 반복이었다. 스페셜 앨범 ≪동백아가씨≫(2010), ≪Malo Sings Baeho≫(2012)와 책 <재즈싱잉의 비밀>(2013)을 낸 것도 하도 곡이 안 써져서 한 짓이었다.

-노래는 물론 작곡, 편곡, 프로듀싱까지 직접 했다.

=작곡을 공부한 적도 없고 곡을 쓰던 사람도 아닌데 스탠더드 재즈가 아닌 한국말로 된 노랫말을 부르려니 곡을 직접 써야 했다. 누가 곡을 써줄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가요 만드는 사람과 작업할 수도 없어서 의도치 않게 싱어송라이터가 됐다. 1993년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자작곡으로 은상을 받은 경력이 있었으니까, ‘쓰지 뭐’라는 심정으로 시작은 했다. 얼떨결에 3집 ≪벚꽃지다≫(2003)를 냈는데 생각지도 않게 굉장히 잘됐다. 그 ‘덕에’ 4집 때 엄청 고생했다. 그런 시간을 거쳐 이번 7집까지 온 거다.

-앨범 준비 기간 동안 많은 곡을 썼고 또 그만큼 많은 곡을 버렸다고 했다. 그 가운데서 앨범에 수록한 12곡은 어떻게 추렸나.

=가사를 굉장히 중요시 생각하는 편이다. 가사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곡이나 내 마음에서 이미 떠나버린 가사의 경우는 걸러냈다. 재즈 뮤지션들 중에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속한 사회와 교육 시스템을 들여다보게 되더라.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나보고 ‘운동권 재즈 뮤지션’이라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고 애를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사건들이 자꾸만 발생하니까 그걸 지켜보는 내 감정과 괴리되지 않는 노랫말을 부르고 싶었다.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사회운동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얘기할 수 있는 선에서 곡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앨범은 그런 생각이 쌓여서 나온 거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잊지 말아요> <제자리로>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앨범 전체의 작사를 맡은 이주엽 작사가를 좀 괴롭혔다. ‘왜 항상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얘기하시냐. 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마음이 있다’고 했다. (웃음) 내 의견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주셨다. 두곡의 가사를 받았을 때 눈물부터 나더라. 엄마라면 딱 느낄 수 있다. 이틀 만에 곡을 썼다.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노랫말에 묻어나고 멜로디 라인은 비애감이 짙다. 앨범 전체가 애잔하다.

=재즈는 블루스에서 태어났고 원래부터 서민, 빈민, 유색인종에서 비롯된 음악이잖나. 재즈가 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저 멀리 있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가까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재즈가 화려하게 비쳐진다면 누가 재즈를 들으려고 할까. 재즈가 시작된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즈는 동시대에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음악이어야 한다. 물론 내 목소리, 내 인생이 우울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즐거운 노래를 하고 싶겠는가.

-<재즈싱잉의 비밀>의 서문에서 기자들은 왜 ‘재즈란 뭔가’라고만 묻고 ‘재즈 보컬이 뭐냐’고는 질문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두 질문에 차이를 둔 이유가 있을 텐데.

=재즈 연주자가 보는 재즈와 재즈 보컬이 보는 재즈는 다르다. 재즈 보컬은 성대라는 악기를 쓰고, 그 악기는 인체와 떨어져 외부에 있는 악기와는 다른 종류다. 연주 방법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악기는 손가락 연습을 해서 손이 가는 길을 익히는 건데 보컬은 연주 컨트롤을 두뇌로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음을 실제로 내려면 머리로 생각을 해서 성대를 조이고 열어가며 음의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자신에게 성대라는 악기가 있고 그 악기를 써볼 만하다고 자각한 건 언제였나.

=본격적으로 재즈와 즉흥연주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95∼96년이었다. 유학(미국 버클리음대) 초기에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즉흥연주자들에게 물었다. “간밤에 나랑 같이 있었는데 언제 그거 다 외운 거야?”(웃음) 외운 게 아니라고 하더라. 그때 ‘아, 나도 이거 하고 싶다. 저 오묘한 원리를 깨우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진학까지 권유받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는데 그걸 뿌리치고 재즈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물리는 노력해서 잘하는 쪽이었지 정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반면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귀가 좋아서 듣는 즉시 기보가 가능했다. 그런데 재즈를 처음 들었을 때 기보가 안 되더라. 박자며 마디 수며 하나도 모르겠고 화성도 안 들리고. 내가 음악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분기탱천해서 배우고자 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가르쳐줄 사람도 배울 곳도 없었다. 그래서 떠난 유학이었다.

-‘한국어는 재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 속에서 ‘한국적 재즈’의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한국적’ 재즈를 뭐라고 생각하나.

=가사만 한국말로 바꾼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생각해야 한다. 재즈는 한겹 더 씌워진 화성에 평이하게 흘러가지 않는 멜로디가 특징이다. 그 속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한국적 재즈를 한다는 게 아닐까. 툭툭 내뱉는 일상의 이야기를 굳이 재즈 화성과 멜로디 안에서 할 이유는 없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 20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의 한국 재즈 신을 돌아보면 어떤가.

=능력 있는 뮤지션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고 재즈에 관심을 갖는 분도 많아졌다. 그런데 뮤지션이 설 무대는 점점 없어지고 감상하는 사람의 수준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재즈는 기본적으로 클럽 뮤직이다. 단순히 클럽에서 연주한다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의 연주라는 의미다. 연주 당일, 연주자는 그날 자신이 어디서 뭘 봤고, 누굴 만났는지를 그날의 무대에서 즉흥연주로 풀어낸다. 연주를 들으면 그날 연주자가 겪은 일을 다 알 것 같다. 이게 곧 재즈의 생명이다. 즉흥 공연을 한번 해보면 실력이 다 드러난다.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서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떤 연주자가 내가 원하는 걸 파악해서 받쳐주고 있는지 등이 단박에 간파된다.

-이번 앨범을 좀더 제대로 감상하려면 어떤 면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진검 승부는 멜로디에서 결정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곡이 후져도 편곡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편곡을 잘하면 된다. 근데 그건 후진 곡이 아니었던 거다. 요즘은 곡을 쓸 때부터 잘 쓰자는 생각이다. 그래서 곡을 쓰기 전 가사를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면 그 가사가 ‘저는 이런 멜로디로 불러주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다. 멜로디가 잘 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 앨범이니 그 점을 생각하며 들어보길 바란다.

-매주 수요일마다 재즈클럽 야누스에서 공연을 한다. 내일(수요일)도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나.

=물론. 가다가다 갈 곳 없으면 그때 오시라. (웃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자. ‘말로’라는 아명은 무슨 뜻인가.

=아버지가 첫째딸은 ‘그런대로 괜찮다’에서 ‘대로’, 둘째딸은 ‘그렇지만 다음 기회가 또 있으니’에서 ‘지만’, 셋째딸인 내겐 ‘정말로 미치겠네’에서 ‘말로’라는 아명을 지으셨다. 남동생은 뭐냐고? ‘좋아’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