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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바디무비] 때로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일러스트레이션) 2015-01-08

<인터스텔라>와 <박스트롤>을 보며 이름을 가진 존재들을 생각하다

<인터스텔라>의 스포일러가 나옵니다만, 그게 참, 스포일러라고 하기에도 뭔가…. <박스트롤>의 스포일러도 나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딸 머피가 아버지에게 ‘왜 자신의 이름을 머피라고 지었냐’며 투정부리는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는 ‘머피란,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름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라며 딸을 달랜다. 내가 딸이었다면 “아빠, 그게 무슨 헛소리야”라고 화를 냈을 거 같은데, 머피는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서 그랬는지 순순히 수긍한다. 세월이 흘러 머피가 다시 아빠를 만났을 때, 머피는 한번 더 따져 물었어야 했다. “아빠, 왜 내 이름을 아빠 마음대로 지은 거야. 머피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평생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왜 아빠는 아들이나 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이름을 지어버리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상하다. 왜 이름은 자신이 직접 지을 수 없을까. 왜 주어진 이름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명 신청을 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간다. 실명을 언급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웃기는 이름들이 많고, 이름을 지을 때 아버님이 약주가 과하셨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이름도 많고,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조롱거리로 만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의미 과잉인 이름도 많다. 유별난 이름을 가진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보낸다. 하지만 내 생각엔 (이름에 대한 놀림이 극도로 심한) 청소년기만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다면 평범한 이름보다 유별난 이름이 살아가는 데는 훨씬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든 유별난 이름은 강한 첫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니까.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비슷한 이름이 많지 않아서 좋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내 이름을 발음하기 힘든 점은 싫기도 하고, 받침이 세개나 들어 있는 안정적인 이름이어서 좋기도 하고, 외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이름이라 싫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과 나누는 첫 대화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부모는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며 아이와 눈을 맞춘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요즘 부모들은 이름에 따른 운을 더이상 믿지 않는다고 한다. 태어난 날과 시에 맞춰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는 일은 드물어졌고, 부르기 쉬운 이름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좋아진 것인지 나빠진 것인지 모르겠다. 작명소에서 강요하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일지 몰라도 ‘이름에 대한 센스’가 없는 부모를 만날 경우에는 더욱 큰 재앙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름에 대한 센스’를 기르는 데 소설 읽기만큼 좋은 게 없다. 소설을 읽고 나면 언어에 대한 감각도 좋아지고, 작가들이 고심해낸 좋은 이름을 만날 수도 있다. 소설가들만큼 이름을 고민하는 직업군도 많지 않다. 소설창작교실에 앞으로는 ‘이름 짓기 교실’을 부록으로 개설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좋은 이름 짓기가 힘들다면 이름을 짓는 대신 ‘노 네임’이나 ‘이름 없음’이나 ‘무제’로 살아가다가 (아니면 그냥 번호나 별명으로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직접 짓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학교는 아비규환이 될 것이고, 부모와 자식은 대화가 더 줄어들 것이고, 사람들은 이름으로 누군가를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아니 어쩌면 번호표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통제하게 될지도 모르겠고) 세상은 지금과 무척 달라질 것이다. 그런 세상도 궁금하긴 하다.

이름을 달고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사람들은 늘 나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나의 이름을 어딘가에 흘리면서 살아간다. 하루에도 몇번씩 나의 이름을 어딘가에 내놓고, 말하고, 적는다. 이름을 달고 사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을까. 죽어서 들고 가기에 이름은 귀찮은 무엇이다. 사람들은 죽으면서 이름을 이 땅에 버려두고 먼 곳으로 떠난다.

2014년 뜻밖에 재미있었던 영화 베스트5 안에 드는 <박스트롤>은 (내 생각엔) 이름에 대한 영화다. 스팀펑크 스타일을 좋아하는 데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도 좋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게 됐는데 만만한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치즈 마을에 사는 인간들과 지하에 사는 박스트롤들의 관계, 박스트롤을 이용해 자신의 야욕을 이루려는 악당의 존재, 어떤 독재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수집단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허망한 것들을 위해 멍청한 집착을 보이는 어른들의 세계 등 구석구석 숨어 있는 은유나 암시가 무척 많은 작품이다. 기괴한 장면을 보면서 키득거릴 수도 있고, 박진감 넘치는 추격 신에 신날 수도 있고, 악당을 무찌르는 통쾌함도 있다. 영화가 끝난 후 스탭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엔딩 크레딧의 ‘메이킹필름’은 웃기면서도 코끝이 찡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한땀한땀 손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재미를 새삼 느낀 영화였다.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박스트롤의 이름들이었다. 박스트롤은 박스를 뒤집어쓰고 사는데, 어떤 박스를 뒤집어쓰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이 결정된다. 생선 상자를 뒤집어쓴 녀석은 ‘생선’(Fishes)으로 살아가고, 단추 상자를 뒤집어쓴 녀석은 ‘단추’(Buttons)로 살아가고, 사탕 상자를 뒤집어쓴 녀석은 ‘사탕’(Sweets)으로 살아간다. 박스트롤과 함께 자란 주인공 인간은 계란 상자를 뒤집어쓴 덕분에 ‘에그’(Eggs)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대부분 복수형으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박스는 주어진 이름이고 운명이자 임시 번호판 같은 것이다. 사탕 박스를 뒤집어쓴 덕분에 ‘사탕’이 된 사탕은 전혀 달콤하지 않은 트롤일 수 있다. 생선 상자를 뒤집어쓰고 ‘생선’이 된 생선은 생선을 무척 싫어하는 트롤일 수 있다. 서로에게 어울리는 박스를 교환하면 좋겠지만 한번 들어간 박스에서 나오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박스트롤들이 일제히 박스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박스를 떠난다. 박스가 없어서 어색한 트롤들은, 더이상 박스트롤이 아닌 트롤들은, 살기 위해서 박스를 버린다. 그 장면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은 아마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얻지 못하고 ‘복수형’의 존재로 죽어간 어떤 이들을 기리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부활한 존재들을 찬양하는 장면일 수도 있다. 감독은 <박스트롤>을 만들고 나서 “모두들 세상에 맞춰 살아가지만, 언젠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어떤 해석이든, 그 장면은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입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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