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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바디무비] 무성영화가 따로 없네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일러스트레이션) 2015-02-26

천상 ‘바디무비’ <폭스캐처> 속 말보다 더 강한 몸의 언어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커다란 보드를 사서 벽에 붙인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포스트잇에 적어서 보드에다 붙이는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소설 속 인물의 관계도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고, 놀고 있지는 않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장점이 많다. 잊지 않으려고, 소설에 대해 계속 생각하려고 보드를 이용한다. 때로는 내 몸을 보드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왼팔에는 남자주인공의 이름을 적어놓고, 오른팔에는 여자주인공의 이름을 적어놓고, 계속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아니면 왼팔에는 내가 좋아하는 등장인물들을 적어놓고, 오른팔에는 내가 싫어하는 등장인물을 적고, 등에는 보기 싫은 인물을 적어놓는 거다(흠, 싫어하는 인물을 적긴 힘들겠군).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자신의 몸에다 문신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몸을 움직이면서 잊게 되는 이야기, 매 순간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몸에다 새기는 것이겠지. <메멘토>의 소설가 버전을 한번 써봐야겠다.

문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야기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다. 문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이야기 자체가 몹시 살벌하지만, 이 단편보다 문신의 의미를 정확히 짚은 작품이 없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유형지에서 한 답사 연구자가 장교로부터 독특한 사형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장교는 사형 기계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게 말하자면 ‘문신 사형 기계’인 셈이다. 죄인의 죄목을 문자로 정리해서 등에다 문신으로 새기는데, 12시간 동안 바늘로 찔리는 고통을 당한 다음 결국 죽게 된다. 세상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도 못하겠다. 게다가 등에 새겨지는 문자를 읽을 수도 없다. 장교의 설명도 기가 막힌다.

“‘그는 자신의 판결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장교는 이렇게 말하고 자신이 하던 설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답사 연구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판결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장교는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고는 답사 연구자가 그런 질문을 한 좀더 자세한 이유를 듣고 싶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알려줘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직접 자신의 몸으로 체험할 테니까요.’”

장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몸으로 체험한다는 말, 문장을 읽는 게 아니고 몸으로 감각한다는 말은 얼마나 멋진 발상이면서 또 얼마나 잔인한 아이디어인가. 문신을 해본 적이 없지만 저 말이 어떤 뜻일지 이해가 갔다. 따끔한 고통의 연속이 문장이 되고 특별한 형상이 된다면, 나는 문신을 읽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겠지. 고통의 기억으로 거기에 적힌 내용을 깨달을 수 있겠지. 그러고보니 지난 회에 소개했던 영화 <와일드>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이혼하는 남녀가 헤어지는 날 문신 가게로 간다. 헤어지는 기념으로 각자의 몸에다 그림을 새겨넣는다. 결혼은 고통의 기억이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자 온몸으로 감각해야 할 한 시기다.

문신은 자신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평화 마크를 왼팔에 새긴 레이디 가가, ‘Lucky You’라는 문구를 새긴 스칼렛 요한슨, 입양된 아이들이 이전에 살았던 곳의 위도와 경도를 팔에다 새긴 안젤리나 졸리, ‘헌신, 인내, 열정’이라는 문구를 새긴 프로 배구 선수 가빈 슈미트의 경우 등 자신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몸에다 새기는 경우도 많다. 숨겨진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 조용히 전하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싶어서, 영화에 문신이 등장하면 꼼꼼하게 살펴보게 된다. 며칠 전, 베넷 밀러의 <폭스캐처>를 보고 나서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생겼다. 주인공의 손에 적힌 의문의 문자에 대해 지금도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폭스캐처>의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폭스캐처>부터 소개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오랜만에 등장한 ‘진정한 바디무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곳곳에서 몸의 언어가 펼쳐진다. 레슬러 가족인 형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와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는 만나면 몸으로 인사를 나눈다. 두 사람이 레슬링 연습을 하는 장면은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최고의 장면이었다. 형은 노련하고 동생은 어수룩하며, 형은 동생을 위하지만 동생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머리를 때리고 어깨끼리 충돌하는 장면에서 이런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둘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괜찮아?” 이런 하나 마나한 말이 대부분이다. 대화가 안 되기는 존 듀폰(스티브 카렐)도 마찬가지다. 대부호인 듀폰은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은 거의 듣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폭스캐처>가 거의 무성영화 같았다. 대사도 많지 않거니와 나오는 대사 역시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내면에서는 엄청난 말과 욕망이 들끓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는 거의 없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영화를 본 사람들만 이 말의 뜻을 알겠지만) 1. “존은 저의 멘토와 같은 분입니다”와 2. “자네 나한테 무슨 불만 있나?” 두개뿐이다. 데이브 슐츠는 1번 거짓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투정어린 2번 말을 들으면서 죽어간다. 스포츠가 주요 소재인 영화인데도 관객의 함성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음악도 기억나지 않는다. 레슬링 도중의 거친 숨소리와 두개의 대사, 눈 밟는 소리, 세발의 총성만 기억에 남는다.

데이브 슐츠가 총을 맞고 죽어가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그의 오른손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P.U.KIDS’라고 적혀 있다. 문신은 아닌 것 같고, 낙서 같다. 이 문구가 이전에 나온 적이 있다. 마크가 데이브에게 ‘폭스캐처’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데이브의 손에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때는 왼손이었다. 어째서 데이브는 이 말을 자주 손등에 적었을까. (설마) 감독 몰래 마크 러팔로가 장난친 것일까. (극중의) 아이가 낙서한 것일까.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자신의 경구를 손에다 새긴 것일까.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였을까. 손에다 뭔가 적는 걸 좋아하는 데이브의 특성상(그는 동생의 전화번호도 손바닥에 적었다) 아무런 뜻 없는 문구는 아니었을 것 같다. 나는 그 문구가 세 사람을 (혹은 마크와 존, 두 사람을) 압축하는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 사람은 어린 시절에 멈춰 서 있다.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며 유아기적인 집착을 보이며 어른들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Three Kids; Body Movie>가 좋겠다. 오랫동안 세 사람의 잘 들리지 않는 거친 숨소리가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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