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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호갱
권혁웅(시인) 2015-03-06

[ 호갱ː]

겉뜻 호구고객이란 뜻 속뜻 호랑이굴[虎坑]이란 뜻

주석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고나니 단통법, 호갱, 직구… 같은 말들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단통법이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어떤 이들은 ‘전국민호갱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갱이란 ‘호구고객’의 준말이지만 ‘호객’이 아니라 ‘호갱’이 된 것은 뒤에 ‘님’자가 따라붙어서 자음동화 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손님을 존대하면서 뒤로는 호구로 여기는 장사치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한국은 휴대폰 단말기 가격과 무선통신 비용이 제일 높은 나라다. 그나마 발품을 팔면 단말기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챙길 수 있었으나 단통법으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줄어든 보조금이라도 받으려면 7만원이 넘는 높은 요금제에 가입해야한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2년 약정만 하면 아이폰6를 0원에 판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보조금이 100%인 셈인데, 우리는 단말기도 비싸, 내는 요금도 비싸, 게다가 보조금도 없어, 전 국민이 호갱이 되었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단통법의 핵심인 분리공시제도(제조사와 통신사가 내는 보조금이 얼마인지를 공시하는 제도)마저도 무산되어버렸다. 그래서 직구(해외에서 직접 주문 구입하는 것)가 더 싸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비단 단통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 전체가 국민을 호갱으로 대우한 지 오래다. 무수한 비정규직을 양산해서 월급을 반 토막 혹은 반의반 토막 냈으니 노동가능인구 전체가 호갱이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복지 혜택이 돌아가게 하겠다(=보조금을 준다)고 약속하고서는 내가 언제? 이러고 있으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호갱이다. 이웃 나라의 원전 참사를 보고서도 노후 원전을 수명연장하려는 시도는 지역민을 호갱으로 보는 것이요, 바다에 아이를 묻은 부모들을 저토록 외면하는 태도는 가족을 호갱으로 보는 것이며, ‘사자방’ 비리로 국고를 거덜내고서도 회고록을 써서 자랑이나 하고 있으니 유권자를 호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을 사막으로 내쫓으면 나라가 사막이 된다. 생활비가 모자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물건이 안 팔린다고 걱정하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따라잡을 방도가 없는데 빚을 내주는데도 집을 안 산다고 걱정하고, 결혼은커녕 연애를 할 여유도 없는데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은 국민이 나라에 가하는 복수라는 말이 있다. 국민이 사라지면 갑질도 없어지고 호갱 양산법 따위도 없어질 테니까. 그러니 실은 호갱이 가장 무섭다. 진짜로 호랑이굴이다.

용례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엉뚱한 속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먹이가 산 채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은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아기 호랑이들에게 사냥 연습용으로 제공된 거다. 그러니까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면 의식한 채로 잡아먹힌다. 호갱을 뭘로 보고!